詩 廣場 119

季刊『산림문학』 2022年 봄號 揭載 (교정의 미루나무).

교정의 미루나무 김인숙 축구공 하나가 미루나무 발목에 걸쳐있다 미래로 미래로 달리지도 못하는 바람 빠진 자전거도 있다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처럼 때로는 이미 졸업한 반가운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큰 키로 어쩌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여전히 수천 명의 아이들 기억이 살아있는 주인할머니의 늙은 얼굴을 보곤 하지 맹렬하게 오르던 찐빵기의 김은 다 식었고 미루나무도 식은 찐빵처럼 초조해질 때 이제 지상의 모든 수업들이 끝나가고 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몇 권의 과거와 같은 앨범을 버리지 못하는 이 쓸쓸한 지구의 방과 후처럼 몇 몇 아이들이 청소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간 이 적막한 시간들이 미루나무의 그리움이다 봄으로 가는 길목, 나무는 이미 긴 허리를 펴고 아이들의 새 얼굴을 익히려고 무성한 징검다리의 ..

詩 廣場 2022.09.27

季刊 『미네르바』 2022年 봄號 揭載 (잠을 위한 노래).

잠을 위한 노래 김인숙 쌓인 잠이 산을 이루고 있다 저녁이 오면 먹구름이 끼듯이 머릿속엔 까만 잠이 들어찬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풍경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하루의 꿈과 잠이 꾸벅꾸벅 온다 아무리 손을 저으며 오지 말라고 두 눈을 부릅떠도 잠은 안하무인들이다 잠을 위한 노래들이 있다 피아노로 잠을 연주하는 곡 잠의 친구인 나른한 때를 위해 음악가들은 자장가들을 만들어 잠에게 헌정했다 오죽하면 지구도 자신의 반쪽에 잠을 가득 싣고 마치 레미콘트럭처럼 하루를 빙빙 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쳐져서 어딘가에 흡입되고 싶다 지금 내게 누구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저 못다 잔 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몸이므로 잠은 몽롱한 그리움이다 잠으로 내 전신을 가득 채우고 싶다 잠이..

詩 廣場 2022.09.27

季刊 『시와세계』 2021年 겨울號 揭載 (한낮의 뒤쪽 /경포대)

한낮의 뒤쪽 外 1편 김인숙 한낮의 그늘들은 사실, 태양의 수족들이다 갖가지 그늘들은 태양의 소속들이지만 어떤 고지서도 발송하지 않는다 목청을 뽑았던 매미들 그늘이 불러들인 한 철이다 매미소리들의 뒤쪽엔 극렬한 팔월이 있다 매미의 날개에서 바람소리가 난다 자작나무 숲속으로 한낮이 기울어진다 나른한 햇살이 드나들던 뒤쪽 늘어난 목을 움츠리는 순간 음지가 단단해진다 날개를 늘어뜨린 악사들 곧 뜨거운 연주는 막을 내릴 것이다 한낮의 뒤쪽은 처마 밑의 낮잠이거나 부피를 늘이는 애호박들이다 나뭇잎들이 꽉꽉 채워 넣는 광합성들 매미가 새빨갛게 달군 기원을 쏟아 붓고 여름의 체온을 올리고 있다 경포대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 더위가 먼저 승차한다 강릉행 버스요금 15,000원, 주문진행 17,000원, 나는 이미 대관령..

詩 廣場 2021.11.18

2021년 문학메카 詩 원고 김인숙(미로정원. 봉안 당엔 몇 줌 풍속이 분다)

미로정원 外 1편 김인숙 내가 알고 있던 길들은 다 어디로 연결되나 누구나 익숙한 행로(行路)를 거쳐 여기 있거나 그곳에 있겠지만 냉장고에서 발견되는 한 켤레의 행선지 미로정원을 헤매는 별자리들 눈앞엔 여전히 푸른 침엽의 벽 그 많던 제자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고 찾아지는, 혹은 미로 동공 속엔 환(環)의 날들이 동글동글 굴러다니고 한 시도 쉬지 않는 전전긍긍이란 풍차와 같은, 더듬어 가는 덩굴손과 같은 멈추면 끝인 그곳들을 향하고 있는가 수시로 열고 닫히는 미로정원의 입구와 출구들 그녀는 내게로 나는 그녀에게로 던지며 놀고 있는 이 천진한 편두통, 물려받은 떫은 피 같은 혹은 추워진 피 같은 봉안 당엔 몇 줌 풍속이 분다 봉안당 칸칸에는 식어버린 영혼들이 들어있다 아무리 밝은 불빛을..

詩 廣場 2021.11.16

季刊 『시와반시』 2021年 겨울號 揭載 (감나무의 시간 )

감나무의 시간 김인숙 선친의 식목(植木)으로 자라고 늙은 감나무의 연중행사란 떫은 것을 보살피고 다시 물렁해지면서 쇠락한 입맛과 입 속을 공경하는 일이였다 몰골은 이미 오래전에 늙었지만 해마다 연두와 단풍을 들였던 감나무의 부음(訃音), 봄볕이 부지런히 독촉을 해도 감나무는 외진 가지 끝 하나 열지 않았다. 일제히 공중을 닫아걸고 고사(枯死)에 들었다. 내가 죽기 전에 감나무가 먼저 부음을 전해 온 것이다. 아침이면 감나무 가지에서 자주 노래를 부르던 참새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가지에 붙은 새의 깃털을 모아서 쓸쓸한 부조(扶助)를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감나무를 찾지 않는 새들은 어디서 서성거릴까 내 허리의 통증도 날로 심해져서 봄날이 끝날 때까지 부지런히 침(針)을 맞던 아침, 감나무 가지에서 참새들이 날..

詩 廣場 2021.11.16

月刊『월간문학』 2021年 10月號 揭載 김인숙(로사) (꿈속의 갤러리).

꿈속의 갤러리 김인숙(로사) 일생을 전시한다는 어느 전시회에 갔어요.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유년과 청년의 시절이었어요. 특히 청년의 시절엔 모퉁이들이 많았고 사금파리가 박혀있는 담장과 줄장미가 갇혀 있었어요. 그 외 시간들엔 빈 액자들이 많았어요. 설령 그림이 들어있다 하더라도 그리다 만 느낌의 추상화들이 주종을 이뤘어요. 나는 심심해서 빈 액자에 낙서처럼 그림을 그렸어요. 갤러리 창밖에서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며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창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내 친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가장 친한 친구를 보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 친구는 나를 향해 침을 뱉었어요. 갤러리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 창문은 이상한 창문이어서 안과 밖이 서로 모른 척 하는 창문이랬어요. 드문드문 끊어진..

詩 廣場 2021.08.25

季刊 『애지』 2021年 가을號 揭載 (어떤 순간)/ 詩評(반경환)

어떤 순간 경각의 어머니가 파르르 흐느낀다 인간은 평생 남을 위해 혹은 남 때문에 울다가 마지막엔 자신을 위해 운다. 그때 둘러앉은 삶은 죽음을 향해 일제히 울음을 터뜨린다 먼 길을 달려 찾아 온 경각을 안심시키려 아직까지 남아있는 눈물을 다 비우려 운다 어차피 울음이란 살아서나 유용한 행위이니까, 죽어서는 자신이 지고 다닐 무게에 불과 하니까 "너무 울지들 마라, 너희들의 눈물은 곧 강을 이룰 것이고 나는 또 그 강을 오래 건너야 한다" 파르르 떨던 울음이 빠져나간 어머니는 망자의 명부에 전입되고 시신은 곧 한 채의 폐가처럼 흉흉해진다 "너희는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너희들 손으론 이 폐가를 허물지 못하리라" 어디서 날아온 초라한 파리 한 마리, 망자의 콧등에 앉아 가느다랗게 떨고 있다. 북..

詩 廣場 2021.08.25

季刊『미래시학』 2021年 여름號 揭載 (열대야 外 1편).

열대야 外 1편 김 인 숙 무섭게 볶아대는 여름밤, 명치끝을 치받고 있었다 ‘난 여름밤이 싫어’ 바싹 조인 목줄에 매달려 거실 바닥에 쏟아진 나는 숨 막히는 비바람을 베고 눕는다 내일부터는 홍대 앞 인디밴드에 머리를 디밀고 여름밤을 부숴 버릴 거야 내게 곧장 불화살을 당겼던 너 너의 맛인지 색깔인지 커트 코베인의 노래로 너를 마지막 본 날이 되었지 우리 함께 밤바다라도 갈 생각은 아니었잖니 오늘은 잘 자야지 내일은 할 일이 많을 거야 남자 친구와 외식을 할 거야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지 깨어보니 거리의 퍼포먼스였고 내 목이 길게 늘어진 새벽 몸을 불린 달을 지고 달렸지 밤을 팽개친 채 with coffee 그녀가 나에게 윙크를 했다 나와 여행을 떠나주시겠어요 그 날 내 머리 속 구름을 그녀는 일시에 몰아냈..

詩 廣場 2021.06.10

季刊『산림문학』 2021年 여름號 揭載 (숲이 돌아왔다).

숲이 돌아왔다 김인숙 여자는 여름 숲을 가로질러가는 바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슬방울들은 알전구처럼 풀잎을 밝혔지만 식물과 사람은 각각 빛이 다르다는 것을 여자는 몰랐다 바람에도 각자 상표가 붙어있고 원산지며 계층이 다르다는 것도 여자는 몰랐다 여자가 늙어가는 동안 여자의 몸은 목피(木皮)처럼 딱딱해져서 태풍이 지나간 흔적만 남았다 가끔 얼굴을 숙이고 울 때마다 송화 가루가 풀썩, 날아올랐다 먼 훗날 여자는 주름진 얼굴로 솔향기를 실은 바람을 따라 숲 사이로 비친 햇살을 삼키며 돌아 온 숲에서 길을 찾았다 ------------ * 2012년 月刊 『現代詩學』 詩 등단 * 2017년 季刊 『시와세계』 評論 등단 * 2013년 제6회『한국현대시협』 작품상 수상 * 2015년 제7회 열린시학상 수상 * 202..

詩 廣場 2021.06.10

隔月刊 『현대시학』 2021年 5-6月號 (허공 속 마을 外 1편).

허공 속 마을 外 1편 김인숙 허공은 기억의 평방미터로 계산되어서 시간이 지나면 한발자국도 디딜 수 없다 그 마을의 굽어진 허공을 넘나들며 오는 소리, 그늘을 피해 묵혀두었던 마을의 설화들이 구불거리며 허공을 탄다 나의 입속 노래는 한없이 늘어졌다 ​더 이상 역광을 지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입속에서 구취를 만드는 한 낮, 기다리는 편지의 답장은 오지 않고 내방에 기적소리를 마구 밀어 넣는 기차 때문에 주머니에 감춰두었던 비밀이 터지는 소리 한낮이라는 허공 속 저 마을 아버지는 바람을 따라가고 어머니는 한 계절을 널어 말리고 누군지 얼굴이 가물가물한 아이는 민들레에게 허공을 읽어줄 때 머릿속에서 긁어낸 찌꺼기들을 풀무질 한다 내가 날아올라서 기억의 평방미터를 누군가의 눈꺼풀 속에 새겨 넣을 때까지 나는, 나..

詩 廣場 202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