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俳句) 제대로 읽기 (連載)
하이쿠(俳句)는 기다리는 봄이다 (連載 제11회)
김인숙
춥다. 아직은 겨울이니 추운 것이 당연하겠지만 요 몇 년간의 추위는 수상했다. 북극의 대기가 내려왔다는 등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한반도 상공을 맴돌고 있다는 등. 이게 과연 북위 37도를 걸치고 있는 한반도에 어울리기나 하는 단어들인가 싶은 말들이 일기예보를 연일 장식했었다. 시커먼 롱패딩이 아니면 막을 수 없는 추위. 세상이 변했다. 이것이 자연이 순환하는 큰 그림인지 아니면 인간이 자연에 몹쓸 짓을 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확실하게 요 근래의 겨울은 이변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하여간 몹쓸 계절이다.
春待つ。하루마쯔라고 읽는다. 참으로 좋아하는 일본말 중의 하나. 일본어를 몰라도 한자를 읽을 줄 안다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 봄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수은주는 여전히 겨울의 한가운데. 하지만 계절적으로 봄이 그리 멀지 않은 2월이 되면 입버릇처럼 되 뇌이곤 한다. 나만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마쯔(春 待つ)는 봄을 노래하는 하이쿠에 가장 많이 쓰이는 인기 넘치는 계절어이기도 하다. 하이쿠의 특성상 수많은 계절어가 존재한다는 얘기는 전에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계절어가 기다림의 뉘앙스를 안고 있는 것은 아마도 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これ程に春待つこゝろ生涯に
이토록이나 봄을 기다리는 맘 내 한평생에(奥田智久 /오쿠타 토모히사)
“이토록이나” 그리고 “내 한평생에”라는 말. 뭔가 비장하다. 단순히 봄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시어라고 보기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절실하기까지 하다. 오쿠타 토모히사(奥田智久)는 왜 그토록 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전 자료조사 때문에 겨울을 도쿄의 세타가야(世田谷区)에서 보낸 적이 있다. 일본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일본의 겨울은 우리나라 보다 확실히 따뜻하다. 나라의 생김새가 길쭉하기 때문에 북쪽엔 정말 추운 동네도 있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들은 겨울이 되어도 좀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 눈도 잘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본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다. 왜일까?
물리적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몇 가지 이유를 댈 수는 있다. 첫째는 일본엔 온돌처럼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난방문화가 없다는 것. 바닥이 따뜻하지 않다 보니 집안의 공기가 마치 길거리에 나앉은 것처럼 차갑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목조로 짓는 경우가 많아 단열이 잘되지 않는다. 때문에 가스 난로나 에어컨을 틀어도 그때만 반짝할 뿐 온기가 오래 남지 않는다. 둘째는 겨울 공기가 이상하게 습하다는 것. 분명히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는 건조주의보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는데도 밖에서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는 겨울인 주제에 축축하고 눅눅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일본에서 겨울을 나기만 하면 목감기 기침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온기가 그리워서 봄을 그토록 기다린다고 말하려니 뭔가 감성이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 뭔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年々に春待つこゝろこまやかに
해 더할수록 봄 기다리는 마음 짙어 가는데 (下田実花 / 시모타 짓카)
일본의 겨울은 특히 2월이 아주 춥게 느껴지는데 거기엔 아마도 심리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봄이 머지않은 것 같은데 공기는 여전히 차가운데 대한 불만 같은 것 말이다. 도쿄가 까마귀 천국인데 마른 나뭇가지 스산한 공원 어귀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두배 세배로 더 춥게 느껴지는 걸 보면 심리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살결이 추워서만은 아니다. 마음이 추울 때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상상한다. 누구에게나 여름처럼 뜨겁고 가을처럼 풍요로운 계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찰나일 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힘든 일을 참으며 더 나은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겨울 같은 시간이 사실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힘든 시대일수록 겨울이라는 계절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봄이라는 시간을 희망이라는 이름과 대치하려고 한다. 해가 갈수록 더 그렇다. 예상보다 훨씬 더딘 겨울의 발걸음은 원망스럽고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시모타 짓카((下田実花 / 1907-1984)라는 작가는 그 마음을 고마야카 (こまやか)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 고마야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개의 뜻이 나온다. 하나는 <색의 농도가 아주 짙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듬뿍 담겨있는>이다. 하나는 색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지만 아주 진하게 배어있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한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타가야에서 맞았던 2월은 무더운 여름날 떠나보낸 남편 없이 맞았던 첫 겨울이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혼자 쓰는 방은 유별나게 휑하기만 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스난로로 온도를 한껏 끌어올려도 새벽녘엔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와 함께 창가 안쪽에 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이 비가 내리듯 주룩주룩 흘러내리곤 했었다. 늙은 몸에 새벽잠이 줄어든 나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일어나 다시 난로를 켜고 어깨에 두꺼운 숄을 두른 채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물방울에 젖은 창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푸르스름한 적막함. 추위보다도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블루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푸른 새벽의 고독이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추웠던 것이다. 하루마쯔. 정말로 그때만큼 온몸으로 봄을 그리워한 적도 없었으니까. 마치 봄이 오기만 하면 이 고독이 자동적으로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리고 그 기다림은 作家 시모타 짓카가 노래한 것처럼 해가 갈수록 더 짙어져만 간다. 정말로 그렇다.
ずぶ濡れの太陽上り春待つ森
흠뻑 젖은 태양이 떠올라 봄 기다리는 숲 (山崎ひさを/야마자키 히사오)
요즘 들어 또 다시 봄날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단순히 나이가 든 탓에 초조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의 기다림 역시 마음의 추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눅눅한 겨울 추위에 젖어있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숲처럼 말이다. 하늘의 대기가 추운 만큼 지상의 삶 역시 삭막하고 팍팍하다. 일을 구하는 사람들에겐 일자리가 없고 일손을 원하는 이들에겐 사람이 없다. 사람은 사람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포용과 이해 대신 차별과 경쟁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드라마 <미생>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회사가 전쟁터라면 사회는 지옥이라고. 어느 새부터인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부르는데 스스럼이 없어져 버렸다. 이 현실이 놀랍지도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이게 당연한 사바세계의 현실이고 그곳에 떨어진 우리들의 업보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세타가야의 푸른 새벽 때 느꼈던 고독이 일상이 되어 있는 시대. 아니 그 이상으로 춥고 가난한 시대.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써나가야 할 세계가 이런 곳이란 말인가? 역사는 진보하고 세계는 발전한다는 믿음은 순진한 착각이었단 말인가?
겨울처럼 얼어붙어 있는 세상이다. 설날이 머지않았고 새로운 봄이 오고 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말로 마음이 따뜻해질 봄은 아직 먼 곳에 있다. 그래도 기다린다. 이토록이나 내 한평생을 걸고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 해가 갈수록 짙어가는 기다림을 안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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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 * 2012년 月刊 『現代詩學』 詩등단
* 2017년 季刊 『시와세계』 評論등단
* 제 6회 『한국현대시협』 작품상 수상
* 제 7회 열린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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