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論 世上

月刊 『시인동네』 2018年12月號 揭載(하이쿠(俳句)는 신선한 재료다)(連載 제9회).

김인숙로사 2018. 11. 19. 14:25

하이쿠(俳句) 제대로 읽기 (連載)

 

하이쿠(俳句)는 신선한 재료 (連載 9)

 

김인숙

 

 

 

  지난 글에서 하이쿠가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사실 언어학적으로 일본어와 가장 유사한 문법적 구조를 갖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다. 주어 목적어 동사 순으로 이어지는 문장의 기본 형태부터 시작해서 조사와 부사의 쓰임새와 동사 어미의 변화 등을 살펴보면 일본어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어와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일본어의 기본문법 30%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 점은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한국어 문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모음이 기본적으로 아 이 우 에 오(あ い うえ お) 다섯 글자밖에 없는 일본어에 비해 한국어는 이중 모음을 포함해서 21개나 되는 모음이 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쉽다.

이런 언어적 특징은 하이쿠를 번역할 때 상당히 큰 강점이 된다. 한국어로 하이쿠를 번역하면 약간의 의역이 필요가 때가 있긴 해도 어순과 시어의 뉘앙스를 해치지 않고 5-7-5라는 하이쿠 특유의 글자 수와 리듬감까지 살리면서 대부분 번역해 낼 수 있다. 하지만 하이쿠를 일본어와 기본적인 문법 구조가 다른 유럽 언어로 번역을 하려면 일본어의 문법 특성과 영어, 프랑스어 등의 문법 특성을 둘 다 절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자면 18세기의 유명 하이쿠 작가인 요사 부손이 쓴 다음과 같은 詩句가 있다.

 

               いばら 故郷てる(요사 부손/與謝 蕪村)

               가시나무 꽃 고향 길의 모습과 닮았으려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詩句와 글자 수까지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These flowering briars

               Remind me of the path

               In my hometown

    

단순하게 위의 영어 번역을 우리말로 기계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 꽃이 핀 가시들. 길을 생각나게 한다. 내 고향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느 정도 번역이 되지만 하이쿠의 특성인 마지막 경탄 어구. 시어의 순서에 따른 어감까지 전달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하이쿠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의 언어 세계에 이제까지 없었던 간결하고 정제된 표현방식을 하이쿠를 통해 실험하고 발굴하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하이쿠가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짐작이 가는 이유는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역사와 정치가 얽힌 문제들.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없는 과거사 등이 일본 문화로 향하는 손길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말 중엔 순화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외국어와 외래어로부터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장치로 번역이 가능한 외국어는 최대한 우리말로 바꿔서 쓰는 것이다. 모든 외국어가 다 이 순화어 작업의 대상이 되지만 이것이 유독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 바로 일본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스시대신 초밥이라는 말을 쓰는 것, 다꾸앙(たくあん/沢庵) 대신 단무지라는 말을 쓰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일본식 부침개라고 하는 오코노미야키(おこのみやき/)처럼 사실상 번역이 불가능에 가까운 단어들도 있다. “오코노미”(おこのみ)내 취향에 맞춰라는 뜻이고 야키”(やき)구이라는 뜻인데 오코노미야키라는 여섯 글자의 단어를 내 취향에 맞춤 구이 혹은 내 입맛에 맞춤 부침개라고 번역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하니 일본어인 오코노미야키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해일을 뜻하는 말인 쓰나미(つなみ/지진해일)처럼 일본어지만 아예 국제어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말로 대체가 가능한 일본어 명사를 지면이나 방송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 된다. 일제에 강점기 시대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이 여전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시문학을 우리니라에서 즐겨보자는 말이 나오기는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현대 한국인들의 삶에 일본식 생활 문화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최근에는 하이쿠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너그러워졌다. 일본의 유명 하이쿠 작가들의 선집이 번역되어 출간이 되고 한국하이쿠연맹이라는 단체도 출범하여 저변을 넓혀나가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전통 시문학인 시조 작가들과 일본의 하이쿠 작가들이 교류와 일본 하이쿠의 번역이 아닌 한국어에 의한 창작 하이쿠 작업도 크게 늘어났다.

앞서 순화어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었다. 외국어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말을 지키겠다는 취지는 필자도 동감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외국어의 유입이라는 게 곧 우리말의 파괴를 뜻하는 것일까? 인터넷으로 온 세계가 실시간으로 묶여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순수한 우리말을 지키며 산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외래어 말고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것 중에 번역체라는 것이 있다. 분명히 문장 자체는 한국어인데 거기서 풍기는 분위기가 뭔지 영어 혹은 일본어 같은 느낌. 번역체라는 것은 외국어를 일대일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예전엔 이 부산물을 그대로 밖에 내보내지 않고 윤문을 통해 보다 우리말답게 다듬으려 애를 썼었다. 하지만 최근엔 일본어투, 영어투가 그대로 살아 있는 문장들이 책으로 출판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말의 고유성이 외국어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되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번역체의 등장은 이제까지 우리말에 없었던 새로운 표현 방식의 유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외래어,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이번 인테리어 프로젝트에서는 유니크하고 모던한 필링을 살려 워크 스페이스와 라이프 스페이스가 밸런스를 이룰 수 있도록 트라이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의 조사만 한국어 일뿐 명사는 죄다 외국어가 차지하는 현상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이라는 뼈대 위에 외국어라는 몇 점의 살을 덧붙이는 일에 공포에 가까운 걱정을 하는 것은 지나친 반응이 아닐까?

    

  최근 거리를 걷다보면 의미 불명의 외국어 간판들이 사라지고 한글로 표기된 간판들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한글이 알파벳보다 더 세련되어 보이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원해서 멋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우리 세대와는 시절이 많이 다르다.

하이쿠도 비슷한 시각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하이쿠를 새로운 표현 방식의 유입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새로운 언어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언어 경험을 풍부하게 해줄 신선한 재료도 될 수 있다. 일본문화의 침투라는 피해의식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언어가 가진 기초 체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최근의 한류 붐에서 이미 확인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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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 * 2012月刊 現代詩學등단

            * 2017季刊 시와세계評論등단

            * 6한국현대시협작품상 수상

            * 7회 열린시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