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論 世上

月刊 『시인동네』 2019年4月號(가부키(歌舞伎)는 새하얀 18번이다.)(連載 1회).

김인숙로사 2019. 4. 25. 14:52

김인숙의 가부키(歌舞伎)

 

가부키(歌舞伎)는 새하얀 18번이다.

  

김인숙

    



          너 무슨 가부키 하냐? 화장이 왜 그래?"

 

   가부키(歌舞伎).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가부키가 일본의 전통무대공연극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가부키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가부키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가부키 화장이다. 귀신 얼굴에 회칠한 것처럼 새하얀 화장. 지나치게 밝은 화장을 두껍게 하거나 화장이 제대로 먹지 않아 붕 뜬 얼굴을 한 사람 더러 가부키 화장을 했냐고 놀리곤 하는 것이다

    

          그럼 제가 노래방 18번을 한 곡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보다 조금 더 윗세대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가부키와 관계있는 말을 아주 오랫동안 썼었다. 그게 바로 18번이라는 말이다. 가장 잘하고 자주 부르는 노래가 뭐냐는 뜻에서 노래방 18번이 뭐냐고 흔히들 묻고 답했었는데 이것도 가부키에서 나온 말이다. 1995년 정부가 우리말 순화작업을 하면서 18번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이제는 자주 듣지 못하는 말이 되었지만 아무튼 중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18번이란 자신 있는 종목을 뜻하는 말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그럼 여기서 가부키에 대한 소박한 의문을 풀고 가보기로 하자. 우선 가부키 화장은 왜 그렇게 횟박 씌워놓은 것처럼 새하얀 걸까? 여기에는 몇 가지 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공연 장소의 조명이다. 가부키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17세기 쯤이다. 지금이야 전통문화로 지정되어 으리으리하게 지은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가부키는 대중연극이었기 때문에 대충 지어놓은 가설무대에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이라 당연히 조명은 어두침침했고 배우들의 맨얼굴로는 인상과 표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다 눈에 잘 띄도록 얼굴 전체를 희게 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가부키는 초기에 여자들만 무대에 올라 여자들이 남자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  여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게 금지되면서 남자들이 여자 배역도 겸해서 하는 형태로 바뀌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남자가 여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얼굴을 완벽하게 지우고 새로 그려야 하기 때문에 도화지 같은 흰 얼굴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가부키 얼굴은 깜짝 놀랄 정도로 새하얗고 가부키 배우들 역시 얼굴에 흰칠을 하는 작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른 연극과 달리 가부키는 별도의 분장사를 두지 않고 배우들이 직접 분장을 하는데 이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바로 얼굴 전체를 희게 칠하는 것이다. 배우들 말로는 시간을 들여 얼굴을 하얗게 칠하면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조금씩 동화해 가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데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정도쯤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봐주기로 하자.

    

  그리고 18(十八番/おはこ).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18번일까? 일본에서 가부키 배우란 하고 싶다고 오디션 봐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몇 대에 걸쳐 가부키 배우를 가업으로 하는 집안이 따로 있고 그 집안사람들만 대를 물려가며 가부키 배우를 할 수 있다물론 가부키 집안 출신이 아닌 외부의 일반인이 가부키 배우가 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렸을 때부터 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든가 제자로 입문해서 사실상 그 집안의 사람으로 오래 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가부키 집안으로 대표적인 가문 중의 하나가 이치카와((市川)이다. 가부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부키 배우가 가끔 하얀 얼굴에 혈관처럼 보이는 붉은 선을 그리고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쿠마도리(隈取/くまどり)라고 한다. 평면적인 흰색 얼굴에 붉고 검은 선으로 혈관이나 근육을 표현해서 배우가  맡은 배역의 분노, 흥분 등의 감정을 표현한 것인데 이 쿠마도리 화장법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바로 이치카와 가문의 좌장이었던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 (市川団十郎: 1660-1704)였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표현 기법을 가부키에 도입했던 것.

    

  그런데 단쥬로(団十郎)의 이름 앞에 초대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이 조금은 낯설 것이다. 초대가 있다면 23대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단쥬로는 이치카와 집안의 대표자가 대대로 물려받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12명의 이치카와 단쥬로가 있었다. 12대 단쥬로가 2013년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현재 이치카와 가문의 단쥬로는 부재상태. 그에게는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蔵)라는 아들이 있지만 아직 단쥬로(団十郎)라는 이름을 물려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의 이름이란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치카와 뿐만 아니라 나카무라(中村)같은 또 다른 가부키 명문가에서도 지켜지고 있는 오랜 전통이다.

    

  어쨌든 이렇게 전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이치카와 가문에서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공연했던 레파토리 중에 가장 자신 있고 또 관객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던 작품을 18개를 골라 가부키18(十八番/おはこ)이라고 명명한 것이 이 18번이라는 숫자가 가장 잘하는 일을 뜻하게 된 유래다.  일본어로 18번을 쥬우하치방(十八番)이라고 읽는데 가부키18번은 가부키 쥬우하치방이라는 말 대신 오하코(おはこ)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하코()는 상자를 뜻하는 말인데 이치가와 가문이 이 작품을 어찌나 중요하게 여겼던지 다른 곳으로 작품의 대본이 유출되지 않도록 상자에 고이 넣어 보관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부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일문화교류행사 차원이 아니면 가부키가 한국에서 공연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당연히 가부키를 직접 본적이 있는 한국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가부키라는 이름 자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왜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쳤다는 역사적 배경도 있고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해외여행 행선지가 일본이라 우리 생활 속으로 일본적이 것들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사실 일본에서도 가부키를 관람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공연장이 대도시 몇 곳 밖에 없고 티켓 값은 비싸며 그나마도 객석수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매진되기 일쑤다. 대표적인 전통문화이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가부키를 즐기는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점은 우리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자국인이 보는 전통문화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전통문화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우리나라 사극을 본 외국인들이 도대체 옛날 한국 사람들은 왜 저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냐며 궁금해 하는 통에 요즘 난데없이 갓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옛날 일인데 말이다. 가부키도 우리에겐 그런 존재일수도 있다. 화려한 무대, 아름다운 의상, 그리고 과장된 몸짓과 연기.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일본의 이미지를 사실 가부키처럼 확실하게 시각적으로 전달해주는 매체도 드무니까 말이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그저 새하얀 18번에 불과한 가부키. 하지만 가부키의 새하얀 회칠 안에는 지금의 일본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들이 꽤나 많이 들어 있다. 두꺼운 화장만큼이나 꼭꼭 숨어 있긴 하지만  한 꺼풀씩 벗겨보면 분명히 보이는 것이 있다. 전통이라는 말은 옛날 것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전통과 옛날 것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옛날 것은 그냥 지나간 옛날 일이지만 전통은 지금도 전해져 오는 현재 진행의 옛날 일이라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넷플릭스를 보며 궁금해 하던 갓은 이제 더 이상 실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옛날 것이다. 하지만 가부키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자국민들도 자주 즐기지 않는 옛날 문화이긴 하지만 가부키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전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