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俳句) 제대로 읽기 (連載)
하이쿠(俳句)는 단샤리(断捨離)다 (連載 제8회)
김인숙
몇 해 전 일본에서 단샤리라는 것이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자로 断捨離라고 쓰는 단샤리는 쓸데없는 물건을 버리고 줄여서 삶을 깔끔하게 정리하자는 것으로 야마시타 히데코(山下秀子)라는 작가가 이에 대한 책을 발표하면서 일본에서 하나의 생활 운동이 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었다.
필자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유난히도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쟁과 가난을 겪었던 우리 세대에게는 어쩌면 숙명 같은 버릇인지도 모른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물건을 아껴서 오래 쓰는 것이 오랫동안 사회적 미덕이었고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 곤궁한 삶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리 크지도 않은 집에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쓸 것 같아서, 아직 쓸 만한데 버리기 아까워 끌어안고 있던 물건들에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고 지금 당장 급하게 내 삶에 영향을 끼칠 물건이 아니라면 아깝더라도 작별을 고하자는 게 끊고 버리고 헤어지자는 단샤리 운동의 핵심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최근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어떤 장르에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은 결국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만 남겨 놓은 후 번잡한 것은 우리 삶에서 치워버리자는 것이다.
번잡한 말을 지워버리고 극도로 정제되고 압축된 언어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 겨우 열일곱자의 글자로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하이쿠란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의 단샤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일까? 아주 오래전에 태어난 시형식이지만 이런 하이쿠의 단순함에 매료되는 현대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도 일본을 넘어 전 세계로 말이다.
하이쿠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역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길다. 제대로 된 시로서 인정을 받는 최초의 영어 하이쿠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 Ezra Weston Loomis Pound) 가 쓴 <In a Station of the Metro>인데 이 작품이 출판된 것이 1913년이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군종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1912년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정거장의 풍경을 그렸다고 하는 이 작품은 이미지즘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초의 영어 하이쿠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5-7-5의 하이쿠의 전형성은 따르지 못하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의 언어적 장벽 때문이다.
사실 하이쿠 번역에 가장 적합한 언어는 한국어다. 발음과 문자가 전혀 다르지만 두 언어는 동일한 계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는 하이쿠의 의미 번역은 물론 5-7-5라는 형식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는 이런 하이쿠의 형식을 지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에즈라 파운드의 이 작품은 동사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14단어만으로 도시의 정거장을 배회하는 군중의 고독한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기존의 영미 문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에는 추상적인 관념 대신 적확한 운율을 지닌 언어에 의한 구체적인 형상화를 지향하는 이미지즘이라는 사조가 영미 시문학계에서 유행하고 있었는데 짧고 단순한 중국의 한시나 일본의 하이쿠가 이미지즘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에 대해 “일본인은 탐구의 센스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미지즘의 美를 알고 있다. 옛날 어느 중국인은 말해야 할 것을 12行으로 말 할 수 없다면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더 짧은 하이쿠(haiku)라는 형식을 발명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는 중국의 한시보다는 일본의 하이쿠가 그가 추구했던 이미지즘에 더 적확한 형식이었던 것이다.
하이쿠에 매료된 것은 에즈라 파운드 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이제는 세계인의 백과사전이 되어버린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로마자로 haiku 라고 검색해보면 일본어가 아닌 언어로 씌여진 수많은 하이쿠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Snow in my shoe
Abandoned
Sparoow‘s nest
내 신발에 쌓인 눈
버려진 참새 둥지.
- Jack Kerouac (2003)
에즈라 파운드가 그랬듯이 작품 역시 5-7-5의 형식은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쿠가 가지가 있는 운율감 그리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각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서양의 하이쿠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취미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 뉴욕의 초등학교에서는 문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하이쿠를 가르치고 있다. 물론 문학을 공부할 때 해외 작품을 배우는 것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외국의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을 배우지 않았는가? 하지만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하이쿠를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외국의 문학작품을 접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 작법의 틀을 익히는 방법으로서 하이쿠를 가르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시 작법을 가르쳐 본 적이 있는 미국의 작가 케네스 콕(Kenneth coke) 은 하이쿠처럼 아주 짧은 시를 쓰는 것은 세 네 개의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며 적절한 선, 즉 말을 선택하기만 한다면 매우 즐거우면서도 재미있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하이쿠가 가진 시작법 도구로서의 미덕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굳이 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이쿠가 가진 정제미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은 많다.
미국의 문호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어느 날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이 내기에서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소설을 써서 내기에서 이겼다고 한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한번도 사용한 적 없음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얘기했지만 필자의 눈에는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이쿠에 더 가까워 보인다고 한다면 견강부회일까? 서양 사회가 하이쿠에 주목하는 것은 하이쿠가 가진 단순함 때문이다. 뉴욕의 초등학교가 하이쿠의 기능적 단순함에 주목하여 시작법의 도구로서 채용했다면 시인들은 하이쿠의 미니멀리즘적인 미학에 끌리고 있다. 현대사회가 이미지즘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요구할수록, 미니멀리즘 같은 단순한 생활양식을 갈구할수록 하이쿠의 매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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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 * 2012년 月刊 『現代詩學』 詩등단
* 2017년 季刊 『시와세계』 評論등단
* 제 6회 『한국현대시협』 작품상 수상
* 제 7회 열린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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