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도계역에서 영월역까지 (제1회)

김인숙로사 2016. 4. 22. 01:53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10. 도계역에서 영월역까지

 

- 상실의 시대로의 여행 - 

 

도계에서의 하룻밤은 물위를 떠돌아다니는 푸른빛들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이따금 망막 세포를 찌르는 빛들이 벌건 태양의 얼굴로 환각 될 뿐 여행하는 동안 내내 태양은 떠오르지 않고 줄곧 비가 뿌렸다. 소설에서 비는 흔히 죽음을 예견한다. 까뮈의 여러 작품이나 헤밍웨이의 몇몇 소설들에서 죽음을 암시하는 비가 자주 등장한다. 비가 퍼붓는 날이면, 이처럼 낯선 고장에서 비를 만나면 나는 알 수 없는 산의 무시무시한 계곡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나의 운명을 때리는 빗물에 어디론가 끝없이 전락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영동 지방의 비는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쏟아지기 일쑤여서 이번 여행의 비도 일기예보와는 무관했다. 

 

 

시계가 아침 5시를 가리키자 새벽이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여인숙의 굴속 같은 방안을 들여다본다. 퀴퀴한 냄새나는 담요 위에 누워 낮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벽지의 누런 하늘색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머나먼 고향 하늘을 향해 산발한 뿌리들을 땅 위로 아무렇게나 드러낸 이국의 꽃처럼 향수의 원천인 앙상한 발 뿌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려고 몸을 구부려 누워본다. 마음은 이내 편안해지지만 한 번 달아나 버린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집에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내게 있어 집 밖에서의 잠은 고통의 시간이다. 잠이란 무엇인가? 잠은 자신만의 고요와 평화의 신이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그의 신에 의해 삶에 지친 영혼과 육신이 위로 받고 원기를 얻는다. 이 지극히 사적인 행복마저 소유하지 못한 나는 잠자리에 들 때면 내 야박한 잠의 신에게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영원한 수면을 청원한다. 어쩌면 나의 삶은 고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삶이 전적으로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불행한 삶이 아니라 언제나 행복한 삶 곁에 있다. 고통은 불행이 넘볼 수 없는 가장 순결한 순간이다. 고통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 희망의 태양과 위안의 별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상념에 사로잡혀 한참을 누워있다 여인숙을 나왔다. 비가 그친 검은 하늘이 물에 젖은 석탄가루처럼 허물어져 내리고 도계의 아침은 폐허에서부터 출발하는 듯 쉬이 밝아오지 않는다. 한때 석탄 산업으로 번창했던 도계의 거리는 지금도 온통 검은 색이다. 검은 역사(驛舍)의 대합실에 앉아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말이 없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것이리라. 자신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 끊임없이 대화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힘이 느껴지는 것은 이곳 자연의 혈맥에 흐르고 있는 검은 에너지가 사람들 사이에 침묵의 배음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강릉행 첫 열차가 들어온다. 이미 집을 떠나온 지 3일 째 되는 날이어서 상행선 열차를 타고 태백과 영월을 둘러본 후 서울로 돌아가려 했지만 오늘은 추암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바꿔 하행선 열차에 오른다.

청량리역을 전날 밤 11시에 출발해 6시간여를 달려온 열차의 객실 안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 고독을 음모하며 납덩이처럼 앉아있는 승객들의 날카로운 눈빛 위로 흘러내린 무거운 졸음들이 고여 있다. 제풀에 지쳐 중도에서 하나 둘 이탈해 나간 사람들의 빈자리에 허무만 가득 채운 열차는 마침내 동해의 더 나아갈 길 없는 육지의 끝에 선다. 사람들은 막다른 길에 섰을 때 가슴에 가득한 허무에 놀라고 당황한다. 그러나 이내 그 허무 너머 그들이 도달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를 동해의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속에 버림으로써 영원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해역에서 봉고를 얻어 타고 추암에 도착하니 적보라빛 하늘이 그 신기한 기운으로 이미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신기하다 못해 서슬 퍼런 하늘을 향해 총검을 세우고 도열하듯 서있는 뾰족한 바위들을 에워싼 철조망이 눈에 낯설다. ꡐ00년 0월 0일 새벽 무장공비 2명 침투, 한 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한 명은 도주한 곳, 일반인 출입 금지ꡑ 라고 쓰인 붉은 안내판이 걸려있다. 추암의 일출은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으뜸이다. 이곳에서조차 민족 분단의 아픔이 상존하다니 남과 북의 사람들은 떠오르는 태양 앞에 얼마나 더 고해 성사를 해야 이 비극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난단 말인가.

 

 

일출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밤을 새워 달려온 사람들과 사진가들이 전망 좋은 곳들을 골라 여기저기 카메라를 삼각대에 거치하고 기다리고 있다. 나도 가방에서 50미리 표준 렌즈를 꺼내 손에 들고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누군가 내 앞에 대포 같은 망원 렌즈를 설치하며 시야를 가린다. 나의 짤막한 항의에 그는 손을 들어 알았다는 시늉을 해 보일 뿐 그대로 자리를 잡는다. 그에게 이 조그맣고 불편한 카메라를 소유한 내가 얼마나 하찮아 보였겠는가. 편리한 물건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지혜와 감각을 무디게 하고 그에게 자신이 덧칠해놓은 개념의 층 저편에 존재하는 어떤 보편적 개념이나 정의도 수용하길 거부하게 한다. 편리한 물건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전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수용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카메라를 만진 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사진은 기구가 아닌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거대한 촬영 장비들을 내보내고 조촐하게 표준 렌즈 하나와 광각 렌즈 하나 그리고 똑딱 카메라 한 대로 필요한 사진을 얻고 있다.

 

 

지난 밤 내내 나의 수면을 괴롭힌 푸른빛들은 어디서 온 것들일까? 그 해 여름, 그녀를 데려간 망상 앞 바다의 시퍼런 하늘이 저 촛대바위 위로 자꾸만 오버랩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다는 관 속의 공기처럼 무겁고 고요하다. 바라보면 수천수만의 면도날 날리는 붉은 수평선. 쓰윽 긋는 새벽하늘이 흘리는 핏빛의 대기는 서럽도록 붉어 끈적한 애증의 독(毒)인데 나는 무엇에 쫓겨 이곳까지 와 그리움에 질식해 가는가. 망자의 편지지처럼 흩날리는 구름 속 저기, 차가운 의식의 철선이 향하는 나의 황량한 주소 위에서 목구멍으로 온갖 죄를 토해내며 폐허가 되어갈 뿐 동해의 풍경 어디에도 내 추억의 은둔처는 없다. 

 

하늘이 종일

누군가의 가슴에서

앓았네, 울컥

뜨는 붉은 노을

붉은 만큼 서러운

애증의 毒

물새들 울음을 傷해

비명 하나로

제 울음 속을

헤쳐 가는 곳

바라보다 그만 내

황량한 주소를

거기 두고 왔네

가엾은 나의 세월

저녁 햇살에 긁히네

긁혀 먼지처럼 쌓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