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소래 폐역 (제2회)

김인숙로사 2016. 4. 18. 08:27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8. 소래 폐역 (廢驛)


-고독의 시작과 중심 그리고 변방

 

이제 현실 안에서 달리기를 포기한 열차는 스스로 철로를 거두어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무한궤도를 깔아놓고 두 평행선 사이를 다만 외다리 뛰기로 건너갔다 건너오고 다시 건너가기를 반복하는 슬프고 힘든 노동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소래에 가지 마라. 그 노동의 대가는 쓰리고도 아프다. 허름한 좌판 위에 쌓인 하찮은 새우젓에도 언젠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붉은 빛은 숨어있어 그대가 포구 난장을 지나갈 때 문득 발등 위로 야광탄처럼 떨어지는 빛의 속도를 고통스럽도록 천천히 인식하며 그대는 한 순간에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오늘날 뽕뽕 다리라 명명되는 이 무한 궤도를 걷고 또 걷는다. 걸음은 이동의 의미로서 단순 목표를 갖는다. 그러나 열차가 퇴역한 지금 녹슨 교각은 그 옛날 방향과 속도라는 보편적 의미를 지탱하던 구체성을 벗어나 본래 지녔던 미분화된 세계의 원형의 의미로 돌아갔다. 교각의 상판 위를 걷는 보폭의 길이와 발바닥에 주어지는 힘에 의해 보행자의 의식 속에 숨겨진 외로움과 그리움의 형식은 결정된다. 이 형식은 언어 의장을 걸친 운문이다. 운문 안에선 보행자의 그리움은 외로움에 의지할지언정 절대 고독의 가운데로 빠져드는 법은 없다. 따라서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포구의 낮은 지붕들의 물매는 한없이 너그럽고 다리 아래 강물은 좀처럼 그리움과 외로움의 형식의 배경을 반사하지 않은 채 강바닥 깊숙이 그것들을 감추어버린다.   

 

 

허공에 우뚝 박힌 철교 교각 사이로 쓰러지는 일몰은 처참하다. 소래강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며 생을 마감하는 늙은 태양의 생명력은 집요한 것이어서 죽음의 검은 장막 뒤로 사라졌나 싶다가도 이내 선혈을 낭자하게 흘리며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차디찬 마지막 호흡을 허공에 쏟아내고는 강물 속으로 툭 떨어진다. 생에 대한 집착이 견디기 어렵도록 긴 것임에 비해 생은 얼마나 순간적인가. 사람들은 어둠이 깔리는 강가에 서서 잊혀진 얼굴들을 떠올리고 습한 갯바람은 그들의 황폐한 그리움 밖으로 분다. 그들은 강 건너 폐염전의 갈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을 바라보며 갈대들을 키운 폐염전이 절대 고독의 변방이란 걸 안다. 고독의 중심에서 고독의 변방으로 이동하려는 의지만큼 그들의 속은 갈대처럼 가벼워져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때 순례자가 되어 허공의 외줄 같은 소래 뽕뽕다리를 건너 고독의 변방으로 이동하게 되리라. 이 때 철교 위에 부는 바람의 휘파람 소리는 누군가 협궤열차와 함께 떠나간 사람을 애타게 호명하는 소리이다.

 

        그 때

 소래 폐 염전에 바람이 불었을까

잎을 번뜩이며 춤을 추는 갈대

모르지, 어둠의 후광이 있었는지는

저녁 해는 내 몸 속

더 어두운 곳으로 彼岸하고

늑골 아래는 어스름이

가슴 한 켠은 바람이 차지했네

아는가 나의 육신 어디에도

갈대의 흔들리는 삶이

숨을 곳은 없다는 거

갈대들은 내 몸 밖에서 울었네

앉은뱅이가 되어

휘파람 울음을 울었네, 그들이

떠나보낸 태양에 대한 그리움이

잘못 자라 내 몸을 덮고 나는

그리움 안에서만 바라보았지

갈대들은 그들 종족만이 아는 가장

고독한 장소에서 일어섰다

쓰러지기를 반복했네

고통이 은밀할수록 몸속이 투명하게

비어가서 마침내 온 몸이

텅 비어지는 날 똑바로 서서

바람의 종교를 갖더군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 고개를 꺾어

순교의식도 거행하더라니까

이제 나도 순례의 길을 떠나야겠지

허공의 외줄 같은 소래 廢鐵橋,

두 평행선 사이를 다만

외다리 뛰기로

건너갔다 건너오고 다시 건너가는 

 

고독의 변방인 폐염전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버려진 넓은 갯벌에 거대한 평등 이상을 실현시켜 나간다. 그 집중력의 주체는 햇볕과 바람이다. 폐염전은 햇볕과 바람을 앞세워 사물의 내부 결속력을 급격하게 와해시켜 지상에서의 폐허의 삶을 완성한다. 소금창고들은 햇볕과 바람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고 염전의 사금파리 위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바다의 특별한 의미는 주체할 수 없는 나태한 시간의 주변에서 소멸되고 만다. 아득히 꺼져 내려앉은 소금창고 지붕의 권태로운 기울기 너머로 안개가 미끄러져 사라지면 순교를 당한 갈대의 늙은 후손들이 허연 뿌리를 들어 올려 그날의 순교에 대하여 바람에 거칠게 항의할 뿐 그럴 때마다 자신들의 속이 점점 비어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고독의 변방에서 나는 소래강의 검붉은 강물이 내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한기가 들고 몸속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의 어둠 속으로 떨어진 늙은 태양이 염전의 나무다리 같은 내 등뼈를 조심스럽게 건너 내 몸 속 더 어두운 어딘가로 간다. 나는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허물어질 것이 많은 내 가슴을 물새가 버려진 소금창고를 지키며 외로움에 가늘어진 말간 다리로 받쳐준다. 이제 저 물새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오르면 내 가슴 속 풍경은 와르르 무너지리라.

이 나라 반도의 중심에서

발을 헛디뎌

내 기어이 백제의 끝까지 왔다

머리 위엔 천년 묵은 갈매기

은 빛 가위 날개를 번뜩이며

끼익끼익 울며 나는데

문득 배꼽이 아프다

기억하랴

탯줄을 자르던 가위질 소리를

끝 모를 어머니의 최초 비명소리를

그리워하랴

내 원초적 생명이 잘려 나온 곳

삼국의 때꼽이란 때꼽 다 끼어

단일 민족 문화만이

무성하게 부패하는 불모의

어머니의 만(灣)을

몸서리치도록 간음이나 하며

어머니의 사투리마저 잊어버린 지금

내 자책의 언어는 무엇이냐

영토 밖에서 우리의 바다는

하얀 물보라를 튀기며 자진하는데

허방 넘어 갯벌은 두리번두리번 달아나는데

 

 

나의 소래 포구 여행은 뒤로 걷기이다, 눈에는 언제나 노랗거나 어두운 색조의 필터를 끼운 채. 마음이 울적하거나 막연한 그리움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땐 카메라를 메고 소래를 찾는다. 현대 산업화로부터 얼마간은 소외된 듯한 소래의 풍경은 나의 영원한 고향이다. 이 곳 갈매기들의 울음은 나의 끝없는 방랑의 인생 항로를 가장 부정확한 언어로 가장 정확하게 제시해준다. 새들의 차가운 금속성 울음은 내 역사의 부재로부터 나의 현실인 비자아의 존재성을 모색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역설적으로 내 시간의 기록은 공간의 기록이다. 나의 시간은 지난 십수년간 소래 포구라는 바다의 모태 적 공간 속에 정지해 있고 그 정지된 시간은 이 공간 속에서 나의 원초적 생명으로 회귀 되는데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키는 나의 탯줄을 자르던 가위질 소리를 갈매기의 금속성 울음에서 확인한다. 그러나 어이하랴 소래의 바다는, 우리의 어머니인 바다는 허방일 뿐인데 나는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