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군산역 (제1회)

김인숙로사 2016. 4. 19. 22:49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9. 군산역


-멈춘 시간으로의 여행

 

군산의 낮거리를 걷노라면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다. 태양은 밝고 바람은 신선하지만 왠지 어둡고 쓸쓸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군산은 목포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가장 번창했던 항구의 하나였다. 호남평야에서 나는 곡물과 서해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수송되던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다. 해방이 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이곳의 시계는 헛바퀴만 돌았다. 아니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조국의 근대화와 의식의 현대화란 거대한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때 남도의 변방에 고립된 시계바늘은 진보의 역사로부터 이탈하여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도 가리키지 못한 채 제 3의 분노와 제 4의 각성 사이에 어정쩡하게 기울어져 있다.



이 곳 사람들은 그 시절의 영화가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엔가 숨어있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보물섬을 찾아 기약 없는 항해를 떠나는 뱃사람들처럼 그들의 눈빛은 허황하고 천진스럽다. 현실과 과거 사이에 흩어진 영화를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는 듯 그들의 말투는 몽롱하고 연약하다.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기계화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스스로 먼저 기계화의 길을 택하는 법이어서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된 이곳 사람들로부터 인간성의 원형을 엿보게 한다.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을 곱게 물들인다. 선창가엔 폐선들과 어선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생과 사의 대립을 하다  어느덧 화해의 몸짓으로 지쳐간다. 바닷가를 걷는 사람들은 버려진 빈 배가 썰물에 제 생애를 지우는 것보다 빨리 노을 속으로 지워진다.  해가 지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있음으로 어두워지고 생명을 잃은 것들은 죽음으로써 어둠에서 해방된다.


보라,
    저 해변의 폐선들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를
    선창가에 부는 음습한 바람
    죽은 것들을 위해 노래할 때
    지상의 모든 폐허여
    일어서서
    캄캄한 하늘에
    은빛가루의 눈물을 뿌려라
    멀리 新항구의 불빛들이
    밤안개 속에서
    흐느끼다 스러질 때까지
    눈물이 유혹하는 것을 멈추지 마라, 바람아



째보선창 횟집들의 희미한 창들은 밤새 감기지 않는 눈이다. 저녁에 잠들어 아침에 깨어나면 신선한 햇살에 비쳐지는 모든 사물은 사라지는 것들을 슬프게 한다. 차라리 눈을 떠서 어둠 안에서 바라보는 어둠 밖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 명멸할 때까지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다. 술집들의 붉은 간판이 밤새 피를 흘리며 야위어가고 길바닥에 새벽 공기는 흰피톨처럼 누렇게 고인다. 째보선창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거대한 밤의 성기다. 바다로 쭉 뻗어나간 폐 송유관은 밤바다의 음기에 딱딱한 남성성을 빼앗겨 부슬부슬 녹슬어 떨어지고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잠든 저 피곤한 방랑객의 성욕을 슬프게 한다. 지금 나그네의 몸을 휘감고 애무하는 바다의 음기는 서양란처럼 질기고 뿌리가 깊어서 몸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한 방울의 비애마저 빨려나갈 때 그는 꿈속에서도 울먹인다.



째보선창과 내항 사이 어디쯤 조그만 구멍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서 날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땐 해가 어느덧 중천에 떠 있었다. 밤새 쓰린 위장에 따끈한 국물이라도 적선할 양으로 군산역 앞으로 갔다. 역전 벤치에 몇 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앉아 담소를 나눈다. 그들의 말소리는 분명하지 않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쳐진 어깨 위로 늦여름의 햇볕이 쏟아질 때 그들의 등 너머 검은 아스팔트가 검푸른 대양처럼 일렁이기 시작하고 그들은 저마다 하얀 갈매기가 되어 만선의 화물선 위를 날며 끼룩끼룩 새의 말로 이야기 한다. 그래, 나는 지금 지나간 한 세기의 영광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한 시절의 절정을 보려거든 그 시절의 폐허 가장 깊숙한 곳에 가 보아야 한다. 한 세대의 하이라이트를 기억하기 위해선 그의 목덜미 깊은 주름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폐허의 깊은 골짜기에 감도는 신비감을 노래할 수 있을 때, 지금은 늙어 쭈그러진 목덜미 깊숙이 감추고 있는 추억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않을 때 그 시절의 영광과 그들 생의 하이라이트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