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11. 신남역 (제1회)
- 유정의 사랑
청량리역을 출발하는 춘천행 첫 통일호 열차는 회색 도시의 납덩이처럼 무거운 잠의 가장자리를 조용히 두드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몸으로 육중하게 전해오는 디젤기관의 진동이 철로에 잠들어있는 여행자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일상적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열차의 바퀴가 레일 위를 굴러가는 것은 이 일상적 의식의 특별한 독해 의미를 갖는다. 마석을 지나고 새벽안개 속에 희미한 문장처럼 떠오르는 철길을 열차가 힘겹게 더듬어 읽어나갈 때 기관차의 앞 유리창에 번쩍이는 누런빛을 먼 과거의 메아리 속에서 울리는 우리네 마을의 고단한 색깔들과 혼합되어 현대적인 빛으로 재현되는 내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나는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 나의 내부가 읽혀지도록, 열차의 흔들림에 조용히 몸을 맡긴다.
서울에서 춘천까지의 통일호 요금은 왕복 오천 원 내외, 나는 가끔 천 원짜리 지폐를 몇 장 호주머니에 달랑 넣고 열차를 탄다. 차창밖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풀꽃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절망했던 배고픔과 사랑의 언어들을 기억해 내고 나는 고개 수그린 꽃이 된다. 차창 밖의 세계가 유리창을 통해 나의 내부와 너무 쉽게 동화되어 하나의 색조로 통일되어버릴 때 나는 어느 간이역 쓸쓸한 안내판, 한 요절한 천재 문학가의 업적 안에 고립되고 만다. 내가 경춘선 통일호 열차를 자주 타는 까닭은 사실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천재 문학가의 풍경을 지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암울한 색조에 흠뻑 젖어 돌아오곤 할 뿐이다.
경춘선은 김유정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938년에 개통되었다. 유정이 짝사랑의 아픔을 안고 서울에서 고향인 실레마을로 내려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한밤중에 가슴을 파고 휘돌아 흐르는 집 앞의 개울물 소리와 산골의 소슬바람 소리였는데, 그의 육신은 창백한 정신에 고의적인 배반을 거듭하고 희망은 지쳐갔으니 구슬픈 기적소리마저 서툰 사랑의 죄에 대한 형벌로 더해졌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유정의 사후에 경춘선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서럽고 억울한 그의 인생에 대한 운명의 마지막 은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남역은 경춘선의 끝자락인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에 위치한 작은 역으로 MBC TV 드라마 <간이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驛舍)는 이따금 찾아오는 대학생들과 문학도들의 발길을 제외하곤 황량한 바람만이 머무는 곳이다. 열차가 이곳 메마른 대기 속에서 참을 수 없는 호흡의 고통에 긴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나는 지독한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열차에서 내려 먼저 역사(驛舍)의 앞마당에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를 카메라에 담는다. 오는 2006년이면 경춘선 복선화 공사가 완공되고 저 소나무도 낡은 역사(驛舍)와 함께 역사의 페이지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현재를 미래의 시간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현재는 과거의 시간에 저항 받음으로써 존재한다. 신남역의 낡은 역사(驛舍)와 소나무는 렌즈 안에서 나의 미래에 저항함으로써 영원히 현재로 존재하리라. 그러나 나의 미래는 어둠이다. 들리지 않는가, 카메라 속에서 불명의 빛이 암흑에 억압되어 울부짖는 소리가.
김유정의 생가로 이르는 길은 여느 시골길과 다름없다. 가파른 언덕길 가엔 오래된 집들이 몇 채 서 있고 그 그늘엔 연약한 들풀들이 실바람에 하늘거린다. 그러나 렌즈를 통과하는 이곳 초본류들의 영상은 세속적으로 불행했던 유정의 영혼의 반영이듯 산 너머 소양강의 매서운 바람에 쓰러질 듯 단단하다. 유정의 작품 활동 무대였던 실레마을의 산천은 그대로 남아 찾아오는 외래객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유정이 살았던 세계 안에서 여러 편린들로 비춰보게 하는데 그들로 하여금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깊은 생각에 이르게 하는 반향과 울림의 기능을 갖는다. 이 반향과 울림은 유정이 이곳에 내려와 꿈꾸었던 이상을 그의 여러 단편 소설들의 줄거리가 말해주는 정신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에 참여한 유정의 영혼으로 이해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 <봄봄>의 무대가 된 이곳 실레마을의 모든 나무와 풀, 시냇물, 논두렁 등은 아직도 현실 속에서 환영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여행객들을 현실과 환영 사이에 서있는 경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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