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10. 도계역에서 영월역까지 (제2회)
- 상실의 시대로의 여행
풍경은 단순히 그대로의 아름다움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울 때 저녁노을이 더 아름다운 것은 추억을 피해 사는 우리의 삶이 어두워지는 저녁노을 속에 은둔처를 발견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추억을 피해 풍경 속으로 숨는 것은 풍경의 언어에 대한 내 감각의 순응이거나 저항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게 있어 여행의 동력은 추억의 힘이다. 여행의 주체인 나의 감각은 일출과 일몰이 의미하는 삶과 죽음의 관념의 구름 속에서 언제나 일몰에 대한 향수로 병처럼 자라는 것이어서 풍경에 대한 저항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내가 여행하는 동안 내내 나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울한 관념처럼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다시 비가 쏟아진다. 서둘러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동해 행 버스에 오른다. 배가 고프다. 벌써 아침 9시가 지나고 있다. 동해역 앞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시켰다. 구불구불한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말아 올려 한 입 우물우물 삼킨다. 부드러운 면발이 목구멍으로 기분 좋게 넘어갈 때 유리창 너머 멀리 안개구름을 걸친 산봉우리들이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눈에 어른거린다. 문득 내 유년기를 통틀어 단 한 번 먹어보았던 자장면 생각이 난다. 중학교에 합격하던 날 삼촌이 사준 것이다. 그 때의 자장면은 가난한 우리들에게 인생의 눈물이요 삶의 목표였다. 흘러간 것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법이다. 아무리 힘들고 슬펐던 일이라도 뿌연 안개의 베일에 가려 아련한 이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는 과거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과거에 기생하는 창백한 미래가 거기에 있다. 현실과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일 때 나는 그것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 뒤섞인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 여울 속을 기어가는 한 마리의 작은 꽃뱀이 되어 비굴하게 현실의 바닥에 넓죽 엎드린다. 불구덩이 속 같은 욕망위로 뜨겁게 퇴화한 이상만이 언제나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또아리 속의 비굴함을 슬슬 풀어 기억의 협곡을 구불구불 헤어가는 완벽한 곡선을 이룰 뿐이다.
자장면을 다 비우고 청량리 행 열차를 탔다. 열차가 나한정역을 지나자 잠시 멈추더니 거꾸로 달리기 시작한다. 스위치 백 구간에 들어선 것이다. 영동 산악 지역은 동해 쪽 기슭이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긴 열차가 고개를 오를 수 없어 지그재그 형식으로 경사를 낮게 해서 산을 넘어가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나한정역까지는 앞으로 달리고 나한정역에서 흥전역까진 거꾸로 달리다가 흥전역에서 다시 앞으로 달린다. 처음 이 스위치 백 구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가는 열차는 상실의 시대를 흐르는 강물이다. 여기서의 간이역은 그 옛날의 번영과 영광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 자체로서 완성된 시간의 댐이다. 열차가 흥전역에서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레일 위에 고인 시간이 갑자기 승객들에게 밀려들어와 그들의 몸뚱이를 점령해버리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의 여울 속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체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시간이 잠시 그들의 눈동자에 멈출 때 과거 속에서 현재를 헤엄쳐 가는 것이다.
열차가 마침내 통리역을 향해 고개를 오르기 시작한다. 고개의 잘룩한 허리를 안개가 휘감고 있다. 안개는 깊은 골짜기도 높은 봉우리도 아닌 산의 중간 부분에 머문다. 안개는 공기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물의 운명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기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한다. 따라서 고개는 물과 공기의 운명을 함께 수용한다. 고개에 서면 사람들은 은둔과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는 상반된 심리에 의해 갈등을 겪는데 열차가 뚫고 가는 안개 속은 그들에게 있어 은둔과 속죄의 공간이다. 사람들이 안개 속을 지나며 운무에 고립된 자신의 내부가 종교적 구원을 향한 양심의 메아리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몸서리칠 때 기관차는 고개를 통과하며 기계학적 힘을 다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차가워졌음을 느낄 땐 열차와 인간은 동족이 되는 무아의 상태로 통리역에 진입한 후이다.
영월역에서 내려 청령포를 향한다. 청령포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뒤 유폐된 곳이다. 유폐소로 건너가는 나루터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파랗게 갰다. 배 위에서 둘러보는 풍광은 절경이다. 노산군이 한양에 두고 온 사랑하는 왕비가 그리워 밤새 서성이다 잠이 들었을 때 그의 어설픈 꿈속에서도 잠 못 이루고 서성였는지 이곳의 병풍 같은 산세와 물빛은 몽유도원의 그것을 닮았다.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 전 이처럼 풍경이 뛰어난 곳에 유폐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임금이 아닌 삼촌으로서 어린 조카에게 내린 마지막 은전인가? 아니다. 이곳은 하늘과 물, 산이 가득 들어차서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따윈 곁들일 틈이 없다. 이 안에서는 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아이 낳는 자연적인 욕망만이 허용된다. 여기선 어린 조카의 연약한 뼈의 속이 복수가 아닌 단단한 무욕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활한 세조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종의 어소를 향해 읍소하듯 누운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 ꡐ단종애사ꡑ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단종의 비 정순 왕후 송씨가 어린 낭군이 그리워 천리 길을 걸어 영월로 가던 중 사약을 가지고 내려가는 금부도사의 행렬을 보고 마지막 가는 임을 보기 위해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애처롭게 발걸음을 재촉하던 모습과 겹쳐 티베트 승려의 오체투지가 연상된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단종의 거소 주변에 오래된 적송들이 서 있는데, 초옥을 향해 굽은 것들과 반대 방향으로 기우러진 것들로 대별된다는 것이다. 반듯하게 서있는 소나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선 소나무도 절개파와 시류파로 나뉘어 몸빛이 피의 색이 되도록 서로 증오하며 척을 둔단 말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암호인 식물의 향일성(向日性)마저 두 개의 태양 사이에서 고심하기를 강요하는 이곳의 태양은 얼마나 야만적인가!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인지 그 끝을 알 수 없다. 욕망은 통상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한계점 보다 언제나 한 걸음 먼 곳에 베일로 싸여있는 마술 상자와 같아서 그 마지막 한계지점부터 욕망에 이르는 불완전한 다리를 건너 마침내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을 때 그만 공허에 갇히고 만다. 우리 인간은 이 공허로부터 탈출하는 비밀의 문을 발견하기 위해 이성에 의탁한다. 그러나 이성이라는 것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결별시키는 완고한 성벽이다. 이성의 힘이 종교적 신념과 결합할 때 그 힘은 막강한 것이어서 인간은 스스로를 초자연적인 견고한 독방에 가둔다. 이처럼 수양대군에게 있어 욕망은 종교적인 신념과도 같았다. 어린 조카의 죽음을 지켜보는 그에게 있어 완성될 수 없는 욕망을 강요하는 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양대군은 초자연적인 견고한 독방에 갇혀 자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감옥 같은 평정을 두려워하며 전국의 사찰을 헤맸던 것이다.
본래의 여행 계획은 청령포를 돌아본 후 단종이 사약을 받았던 관풍헌과 그가 잠들어있는 장릉으로 갈 참이었으나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단종의 죽음이 이곳의 산과 강과 하늘과 일체가 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덤은 한 생애의 종착지점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의 의미를 갖는다.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았을 때 그의 실체는 이미 청령포의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빈껍데기만 남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 풍경은 인격을 갖춘 인식의 대상이다. 여기의 꽃잎들이 어린 생명이 쓰러지듯 쉬 떨어지고 낙엽이 골육상잔의 역사를 이어가듯 해마다 핏빛으로 물드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노산군이 기대어 시름을 달랬다는 관음송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그의 비탄의 노래로 들리기 시작하자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북서쪽 벼랑 위에 서 있는 노산대와 망향탑을 향한다.
노산대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영조 2년(1726)에 세운 금표비다. '동서남북 사방 각각 사백 구십 척 이내 일반 백성 접근 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단종이 죽은 지 2백년 후에 세운 것이지만 그 당시 단종 자신에게도 이 같은 금족령이 내려졌으리라. 유폐는 강요된 외로움이다. 청령포에 유폐된 단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과의 접촉이 차단된다. 강요된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고독과는 다르다. 고독은 타인이나 대상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반성을 갖는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그들과 상호 이해의 관계를 갖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고독은 다분히 자의적이며 낭만적이다. 고독을 느낀다는 것은 실제로 전혀 고독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때라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고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요된 외로움은 자신의 상대적인 존재인 타인을 잃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영구적인 고립일 때, 다만 말없는 풍경에 둘러싸일 때 사람들은 주위의 대상들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거나 침묵하는 돌이 되어간다. 노산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서쪽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올라 한양의 하늘을 바라보다 돌들을 주워와 탑을 쌓으며 외로움을 달랬는데 이 폐군(廢君)은 세속적인 감정과 삶과 죽음의 의미를 초월하여 하나의 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그리움의 절망만이 유유히 흐르는데 어린 노산군이 선택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대상들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곳의 풍경과 일체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느덧 해가 많이 기울었다. 다시 단종의 어소로 내려와 방안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비련의 임금님께 작별 인사를 올린다. 귀양처의 움막은 그 곳에 유폐된 사람을 더욱 강인한 개인으로 만드는가. 지상의 가장 높은 위엄이 아닌 비참한 밑바닥의 울분이 아닌 감옥처럼 견고한 평정을 대면한 채 말없이 정좌하고 있는 노산군. 그러나 그의 창백한 뺨과 가냘픈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는 17세 소년의 비애를 느끼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그래, 꽃 지고 잎마저 져버린 계절, 구름과 바람만이 처연한 발자국을 찍고 가는 이 척박한 시간 속에 얼치기 시인의 감상 어린 관념이 만발하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구슬픈 기적소리를 울리며 철교를 건너가는 열차여, 주어진 운명의 길을 앞으로만 나아가도록 선고받은 무의식의 일생이여 또 다시 원시의 고독을 헤매는 이 여행객의 어지러운 발자국은 너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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