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8. 소래 폐역 (廢驛)
-고독의 시작과 중심 그리고 변방
수원에서 인천 송도를 연결하던 수인선은 사라진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속엔 장난감 같은 협궤열차가 오늘도 뒤뚱거리며 달린다. 오후의 기차로 춘천의 신남역과 김유정 생가를 둘러보려고 나선 발걸음이 소래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이 상상의 열차에 몸을 실은 후이다. 나는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벌겋게 녹슬어 아무렇게나 버려진 철로의 파편과 젓갈 냄새가 나는 침목들의 미세한 진동을 느낀다. 울림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증폭되어 내 무질서한 의식을 균열시키고 잊어야할 것들과 잊혀진 것들이 층을 이루는 곳까지 여진은 계속된다. 이 울림이 스스로 멈추기엔 내 의식과 육체는 너무 비좁은가? 내게 여행은 얇은 욕망과 지독한 권태가 이루는 부정합의 의식의 단층들이 누르는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 무기력한 육체로 도피하는 것이다. 상상의 열차는 내 무기력한 육체를 관통하고 나서야 소래의 고독으로 들어가는 폐역(廢驛)에 정거한다.
폐역사(廢驛舍)는 포구의 쓸쓸한 풍경들을 과거로 끌어들여 각각의 풍경 가장 깊숙한 곳에 오늘의 절대 고독을 완성시키고 이곳을 뜨지 못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 중심에 세운다. 나는 카메라 렌즈의 포커스를 이 중심에 맞춘다. 렌즈를 통해 확인되는 시공은 이곳 풍경들이 이루는 공간의 불연속선이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포구의 허름한 지붕들과 낡은 어선들의 뱃머리에서 반사되는 빛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교차되어 상존한다. 사람들은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 끼어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현대화의 산물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흘러간 것들에 대해 저지른 필연적인 박해였음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은자(隱者)가 되어 망각의 어둠 속으로 숨는 순간 그들은 이미 낡아버리고 만다.
흘러간 것에 대하여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슬픈 기억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슬픔은 그 속성상 자신의 감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미완성적인 것이어서 달콤한 망각의 심연을 향해 뒷걸음질하는 과거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어물전 늙은 아낙에게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한다. 현재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카메라가 담는 빛의 안에서 음화로 구워져서 현재와 단절된 슬픔의 시간으로 소래의 먼 과거 빛 속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리라.
고독은 때때로 사람들의 이마를 환하게 빛나게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날은 필경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낯선 젊은 여인이 나타나거나 역사(驛舍)의 지저분한 담 벽에 새로운 나이트클럽 광고가 붙는 날이다. 광고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법이어서 광고 속 반나의 아가씨들과 이곳 가난한 사람들의 성욕이 충돌하는 동안 누군가 저 음습한 폐역사(廢驛舍)의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몸서리치도록 수음을 하며 자신의 낡은 욕망과 비참한 성욕으로부터 탈출하는 은밀한 통로를 발견해 내고는 늙은이처럼 소리내어 울었으리라.
고독의 한 가운데는 녹슨 철교가 불안하리만큼 높이 서 있다. 염전 산업이 한창이던 시절 협궤열차는 승객들과 경기 서남부 일대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이 다리를 건너 인천 송도로 실어 날랐다. 소래강 너머로 해가 지기 몇 분 전 열차가 기우뚱거리며 철교 위에 모습을 드러내면 교각의 붉은 색과 열차의 기적 소리, 사람들의 탄성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그 어떤 우울한 넋두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정서를 자아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열차에서 내리지 않을 땐 마중을 나온 사람뿐 아니라 역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들까지도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열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어 몽환의 세계로 유인했다. 그들은 무의식의 힘에 휘둘려 열차가 남기고 간 그리움의 허상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키고 몽상의 가장자리로부터 환상의 절정으로 차츰 이끌려 들어갔는데 환상 속엔 어렴풋한 느낌과 감각이 깃들어 있어 그들의 내부에 찌들어 있는 막연한 그리움과 슬픔이 기차가 사라진 어스름 속에서 흑과 백으로 반전되어 서서히 드러나는 실체를 자각할 때가지 어둠은 참을 수 없도록 더디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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