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7. 망상역 (제1회)
- 아픈 사랑의 추억
동해의 열차는 경부선이나 호남선 그 밖의 다른 노선에 비해 속도가 완만하다. 속도는 안정을 안으로부터 파괴해 나가 편리성에 그 실체를 숨긴다. 따라서 동해선을 타면 한없이 편안한 느낌을 갖는다. 어쩌면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와 함께 달리는 열차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느린 완행열차의 기관사는 고정된 지식과 사상을 가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다. 간이역을 떠나는 열차의 애절한 기적소리가 높은 동해의 산맥에 가로막혀 다시 되돌아올 때 그는 망망한 대해의 관중 앞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연주하는 예술인이다.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우리와 가장 친근한 곳에 있으면서 고독의 세계다. 오늘날 도시 사람들은 고독하다. 그들은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자신의 고독한 그림자로 상대방을 덮어버린다. 그들은 고독의 그림자 안에서 미지의 세계를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은 완행열차를 타고 먼 곳만을 바라보며 이성의 순수한 혼란을 향해 끌려가는 목이 긴 사슴들인지도 모른다.
동해시 망상동 7번 국도와 소나무 숲 언덕이 스치는 곳에 조그만 간이역이 서있다. 여름 한 철 근처 해수욕장의 개장과 함께 몇 차례 완행열차가 설 뿐 해수욕장이 철시하면 일 년 내내 햇볕과 바람만이 다녀가는 역, 역무원도 열차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통과역 망상역이다. 통과역엔 어디에도 도달 할 수 없는 허무의 레일이 놓여있다. 그 위를 지나는 열차는 달리면서도 멈추어있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두 잊어버려야 달릴 수 있는 곳, 이곳이 망상역이다. 오늘날 간이역은 운송과 적재(積載)라는 물리적 기능에서 만남과 이별이라는 상징적 기능 같은 구조적 기능을 이탈하여 환영으로부터 환상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적인 수요를 갖게 되었다. 고정된 하나의 장면이 아닌 수시로 그 모습이 바뀌는 것이어서 여행객은 간이역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런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고 간이역 고유의 이미지들이 그의 생각을 채워버린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면 여덟 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 기다리는 것은 혼자서 덜컹거리는 허름한 목조 문짝과 대합실 안벽의 색 바랜 낙서들뿐인데 이 먼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오늘의 사랑은 삶에 지친 인간들의 초라한 도락으로 전락했다. 가슴을 뛰게 했던 그 무엇을 찾으려는 사람은 간이역에 와서 낙서들을 읽어 보라. 어쩌다 그들이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그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앉아서 느린 열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가슴을 비추어 보라. 사랑의 의미에 부르르 떠는 심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낙서는 상상의 세계이고 그걸 읽는 사람은 현실이다. 낙서의 몽롱한 촉감이 그의 몸에 와 닿을 때 먼지처럼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어 현실이 아닌 상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혹여 낙서 속의 주인공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구체적인 대답을 듣게 될 때 낭패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파도소리와
모래바람이 놀다 간
낡은 대합실에서 듣고 있어
낙서 속의 주인공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덜컹거리는 창문이 자꾸만
대답하는 소리를
그래,
열 번의 여름바다와
그 위에 부는
사나운 바람 속에서 우리가
기다린 것은 무엇인지
오늘도 연착하는 완행열차는
가르쳐주는 거지
철지난 해수욕장 모래는 아직
발아래 뜨거운데
사랑이란 이름의 마지막 열차를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
십년 전 이 때 그녀와 내가 정동진을 지나 망상역에 도착했을 때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이 조그만 간이역을 동해의 산맥은 배타주의적인 자기 구속 밖으로 엄격하게 밀어내고 동해의 바다는 신비주의적인 자기 은거의 외곽 안으로 조용히 끌어들이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자 백사장의 강렬한 공기가 내 근심을 쑤셔오기 시작하고 회갈색 하늘은 근심의 배후로서 쓸쓸한 소나무 숲을 거느리고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스러져 가는 별똥별 같은 내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가련하게도 숭고한 정신의 벽을 헐어 방패를 세울 뿐이었다. 어둠은 피동적 자아를 무료화 시키고 능동적 자아를 부활시킨다. 어둠 속에선 사람들은 대담해지고 창조적 양상을 띠는 법이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내게 사랑의 결단을 요구해 왔다. 나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대학생이던 그녀와의 미래는 불투명한 것이었다. 우리는 끝내 막차를 놓쳤고 심하게 다투었다. 모래언덕엔 밤새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하얀 치맛자락을 수의처럼 날리며 모래 언덕을 내려갔고 그믐달은 그녀의 등 뒤에서 비수처럼 번뜩였다. 아, 나는 알았어야 했다. 내 몸속의 뼈들이 자정 넘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일제히 일어설 때 발등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풀잎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녀는 물속에서 손목을 그었다. 물에서 건져 올린 그녀의 눈빛은 슬프고 신비했다. 그물에 걸려온 고래처럼 마지막으로 바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이해한다는 듯 스물두개의 힘줄이 끊긴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부동의 세계로 헤엄쳐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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