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賞

시집 인터뷰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김인숙로사 2021. 3. 6. 13:23

새벽에서 황혼까지 (김인숙 - 김건영).

月刊 『현대시』 2020年10月號 揭載

 

김건영 : 안녕하세요. 이렇게 첫 시집을 읽고 시인을 직접 만나 뵙게 되니 무척 기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라 제가 시를 쓰고 등단을 하고 난 후에 얻은 큰 기쁨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독자였으면 절대 못 겪을 일이잖아요. 그리고 첫 시집이 유난히 특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껏 시인이 살아온 생의 압축판 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인숙 시인께 안부 인사와 함께 첫 질문으로 시집을 낸 후에 달라진 것이 있는지부터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인숙 : 시를 쓸 때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위치감이나 공간감이 생겼다는 게 달라진 점 같아요. 첫 시집이 나왔을 때의 느낌이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거든요. 이제까지는 막연히 떠오르는 시상을 반사적으로 토해내듯이 시를 썼다면 시집이라는 하나의 집을 갖게 된 후엔 각각의 시가 가진 의미와 위치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되었어요. 집에 침실이 있고 거실과 주방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번에 쓸 시는 마치 침실같은, 다음에 쓸 시는 주방같은 느낌을 주는이런 식으로 시에 대한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시각화된다고나 할까요? 좋게 생각하자면 시를 조금 더 큰 시야에서 정리하는 눈이 생겼다고 볼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이런 틀이 제 자신을 묶어버리는 매너리즘의 족쇄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도 하고 있습니다.

 

 

김건영 : 제가 이 시집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첫 감각은 표면장력의 이미지였어요. 무언가를 잔에 따를 때 딱 맞게 넘치지 않게 따랐을 때의 만족스러움 같은 거라고 할까요. 풍부한 감정과 내면에 대한 반성과 탐구가 있고, 외부 세계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과하게 교훈적이지 않은 것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외부의 사건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꼭 자기 입장에서 한 마디 더 보태곤 합니다. 그게 시적이지 않고 불편한 장면은 만듦에도 불구하고요. 반대로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구는 거죠. 반대로 시인께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반대로 외부의 현상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단하지 않고 직접적인 교훈을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약력을 보고 시인께서는 대학 강단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면면이 혹시 시인께서 교육자로 오래 지내시면서 나타난 특성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김인숙 :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대학강단에 선다는 건 양쪽의 측면이 있어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다보면 내가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나은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거든요. 반면에 그런 속성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더 되돌아보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불완전한 자아와 마주하게 되잖아요. 이런 내가 누구를 향해 무슨 교훈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냉정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타인의 불완전함을 마주했을 때 관대해질 수있는 거고요. 공범의식이라고 하면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런 것 있잖아요. ‘어머, 너도 그렇니? 사실은 나도 그래. 어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사람이란 나이나 지위를 떠나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사회에 나온 이상은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들을 관찰할 수는 있겠지만 평가를 할 입장은 아니갰지요. 말씀하신 감각의 표면장력은 그런 태도에서 얻어지는 것 같아요. 다만 제 스스로도 이런 관조와 비겁한 방조를 헛갈릴 때가 있죠. 그래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삶이라는건 언제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과 눈을 맞추고 걸어갈 때 천둥은 치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 동행이라는 그 아름다운 말과 함께 당신이 보고 있는 저 구름과 새의 비행을 어제의 달콤한 속삭임이었다고 이야기하면 당신은 무엇으로 나를 진정시킬 것인가 너무 많은 비상구를 가진 당신과 당신 사이에서 나는 또 무엇으로 나를 설득시킬 것인가 당신의 눈을 가리는 태양의 무늬를 이제 허상이라 이야기하겠다 내가 당신과 눈을 맞추고 걸어갈 때 천둥은 치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 당신이여, 이것마저 허상이라 이야기하지 말자 푸른 자전거의 푸른 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먼 훗날까지 나는 지켜봐야 한다 누군가 당신을 불러주기 전까지 누군가 당신을 닫아주기 전까지 너무 많은 눈을 가진 당신을 나는 기록해야 한다

 

-거울과의 동행, 전문

 

김건영 :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인 거울과의 동행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읽고 나서는 저 역시 언제까지고 거울과의 동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이 동행자가 반드시 자기자신으로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여러 번 읽어보니 거울처럼 닮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나 반려인 같은 존재들이요. 그리고 아버지 역시 혈족인 아버지 말고도 관념적인 아버지, 이 세계, 혹은 인간의 본성 자체로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눈을 가진 당신을 나는 기록해야 한다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가 배척하는 사람들, 사상적으로 반대인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나의 거울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시인께서는 이 시를 어떻게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인숙 :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는 걸 통해서 자신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결국 내 자신은 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는 건 여러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을텐데 마치 유체이탈하듯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내 모습일 수도 있고 말씀하신대로 나를 반영하는 타인들, 가족이나 부부, 연인의 모습이 될 수도 있죠. 거울에 비친 모습과 내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서로 가장 정반대를 보고 있는 지점이 됩니다. 내 자신의 좌우가 뒤바뀐 모습이기도 하고요. 서로 같은 지점을 보고자 고개를 돌리면 아예 서로의 모습을 인지할 수 없게 되는 아이러니. 가장 가까운 것이 사실은 나와 가장 반대의 모습에 서 있다는 모순과 그것에 실망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모든 관계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를 제일 첫번째 배치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당신이라는 나라에 가기 위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체온이 끓어오르고 있어요

이렇게 온몸에 불을 붙여 상승하다 보면

언젠간 재만 남게 되겠지만

, 어때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인걸요

 

범접하기엔 차마 먼 빙벽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은 굳게 닫혀 있군요

평생을 치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을

지축(地軸)이라 불러도 될까요

고독이라 불러도 될까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천공(穿孔) 속의 당신

 

당신이라는 나라에 닿기 위해

나 오래전부터 화려한 분신을 꿈꾸었지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불을 품고 살았지요

 

제발 틈을 보여주세요

화려한 분출을 보여드릴게요

 

 

-마그마, 전문

 

김건영 : 시집의 두 번째 시인 마그마도 아껴 읽었습니다. 마그마는 돌이 녹아 액체화 된 것일 텐데요. 그 고온의 몸체도 녹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단수가 아니라 아마도 복수일 것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발화하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어때요/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인걸요우리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고, 오직 가능한 것은 자기자신의 태도만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마음이 녹아내린 이유는 아마도 이 슬픈 일을 거대하고 강력한 다짐 보다는 체념을 통해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를 두 번째로 배열하신 이유도 시인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김인숙 : 이 시를 두번째에 배치된 건 아마도 제 성격이 급해서겠죠? 난 이제까지 이렇게 살았던 사람이다라는 고백을 빨리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로 쓰인 당신이라는 인칭을 이성으로 받아들이면 이 시는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뭔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답답한 세상이라고 상정한다면 일종의 삶의 투쟁가라고도 볼 수 있어요. 이 시를 썼을 때의 제 마음도 사랑과 투쟁 사이의 어딘가쯤에 있었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말씀하셨듯이 뭐 어때요부분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쿨한 척일 수도 있고, 투정일 수도 있고, 도전일 수도 있는 거죠.

 

 

김건영 : 또 제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시가 한 편 더 있습니다. 저는 교차로 Y라는 시가 그랬는데요. 사고 장면을 직접 목격하신 듯한데, 마지막 구절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죽음은 대개 직시하기 어려운 일일 뿐입니다. 지인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대부분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하고 싶은 일이고요.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바라보아야 함을 잊지 않은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란 모자가 놓친 아이가 농어를 들어 올려 품에 안는다/농어의 입에 숨결을 불어넣는다이런 구절을 읽고는 시인께서 많은 존재들을 보듬어 주었다는 생각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부터 아버지께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 되셔서 걱정이 많습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피할 방법이 없는 예정된 이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 시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꼭 물어봐야지, 하고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김인숙 : 그 시는 실제 사고를 목격하고 나온 작품이었습니다. 그때 현장의 분위기가 너무 절박했었어요. 겁에 질려 엄마를 찾는 아이들. 그리고 물밖으로 내동댕이쳐져 숨도 못쉬고 괴로워하는 물고기들. 다행히도 인명사고는 아니었지만 그곳에는 노란 색 모자와 펄떡이는 비늘로 시각화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거지요. 그 공포에 대한 저항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저항 보다는 연대라는 말이 더 잘어울릴 것 같네요. 아이가 농어를 끌어안고 숨을 불어넣는다는게 과학적으로 농어에게 도움이 되기나 하는 건지 우리들은 모르지요.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까지 그려진다면 더더욱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 같았습니다.

 

 

김건영 : 시집의 표제작인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를 표제로 정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약속은 매우 추상적이고 이 시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산은 언제나 일인용이다라는 구절과 마지막의 왼쪽 어깨가 다 젖는다를 통해 시인께서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잃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신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김인숙 :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속이 있다고 생각해요. 손가락 걸고 언제까지 뭘하자고 했던 사람들간의 약속 말고도 내 자신에게 했던 약속, 신 앞에서 했던 약속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자 이유가 될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언젠가라는 시한을 둔 것은 이 약속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는 이뤄지지 않는 일종의 숙제이자 짐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어떤 약속을 제 자신에게 했었나, 어떤 다짐을 신 앞에 했었나를 언제나 되새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산이 언제나 일인용인 것처럼 그 약속을 위해 나아가야할 길 역시 혼자 가야하는데 한쪽 어깨가 젖는다는 건 미션을 실패라고 볼 수도 있어요. 자신의 몸을 비로부터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제 어깨가 젖는다면 그런 실패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어딘가에 꽃이 핀다는

사막의 내일을 보기 전까지

 

이 사막에서

나는 나의 공전을 끝낼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의 반성, 전문

 

김건영 : 시집 전체적으로 차분한 어조가 인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잔잔히 흐르는 시인의 의지는 매우 강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의 태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막으로 밀려나거나 유배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처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나의 공전을 끝낼 수 없습니다마지막 구절을 보며 시인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의 고난은 시인 스스로가 선택하고 그것을 기꺼워 해야 함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를 마지막에 배열한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라고 짐작 합니다. 더 부연해 주실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김인숙 :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 중에 하나가 넋두리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등단했다는 이유로 자꾸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글이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를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지나간 기억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 살아나갈 시간이고 기왕에 시를 쓸거라면 그 시간에 힘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다짐이나 의지를 드러내는 시어들을 고를 때가 있습니다.

 

 

김건영 :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아 주셔서 그것 역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시집의 이미지를 궁리해 봤더니 새벽과 황혼녘의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감이 떠올랐습니다. 공포영화의 제목 중에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생각났고, 시인의 마지막 시에 나타난 사막의 한낮의 이미지를 겹쳐보니 새벽과 황혼을 잇는 뜨거움이 바로 이 시집이 아닐까 하여 이 대담의 제목을 새벽에서 황혼까지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집을 낸 이후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나 추구하는 시세계 얘기도 마지막으로 듣고 인사를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인숙 : 너무 맘에 드는데요.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면 뱀파이어 나오는 영화잖아요. 새벽 이후는 뱀파이어와의 싸움이 끝난 조용한 시간이지만 새벽부터 황혼까지라면 그 시간 동안 뜨거워서 좋고, 황혼 이후부터는 다시 뱀파이어들과 싸워야 할테니 치열해서 더 좋은데요. 첫 시집을 내기까지 이것저것 많이 써오면서 마음 속에 쌓아왔던 것들을 계속 아웃풋만 했었어요. 쓴만큼 채워넣는 인풋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제가 봐도 뭔가 바닥이 드러나는 느낌입니다. 일단은 남들이 그 바닥을 눈치채기 전에 인풋을 하는데 조금 더 집중해야할 것 같고, 이제까지는 제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시를 많이 써왔는데 앞으로는 그 질문에 대답을 찾는 시들을 써보고 싶습니다. 과연 공감할만한 대답이 나올지 여러분들께서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