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賞

季刊 『시와세계』 2017년 評論賞 受賞

김인숙로사 2020. 11. 14. 18:42

 

텅빈 自然으로 걸어가는 하이쿠와 禪詩

 

1. 미국 초등학생과 하이쿠(俳句)

2. 단순함이라는 매혹

 

3. 하이쿠 그리고 이미지적 禪佛敎

 

4. 대중의 놀이였던 하이쿠

 

5. 하이쿠,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를 만나다

 

6. 선불교와 하이쿠의 交集合

 

7. 어디까지나 하이쿠는 하이쿠

 

8. 하이쿠는 일본인을 비추는 거울

 

<受賞所感>

 

평론과 用後期 사이

 

  ‘평론은 창작에서 실패한 자들이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누가 먼저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중에 널리 퍼져 있는 이 말을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동조해 왔다. 선의로 이해해 보자면 이런 말은 틀림없이 어떤 평론가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라는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예전의 나는 이 말을 평론가들을 향한 비아냥으로 악용해 왔었다. ‘제깟 것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뭔가를 직접 만들어 낸 사람도 아니면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면서도 부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직접 만든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라고 자만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일상생활에서 작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새로 산 물건마다 따라 붙는 취급주의 설명서보다 인터넷에 떠도는 使用後期들이 훨씬 才氣가 넘치고 쓸모가 있어서 그 덕분에 새로운 씀씀이가 발견되고 그 물건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창작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창작물이 작자의 의도대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며 작자의 세계관과 다른 눈을 가진 제3자의 시선을 거쳤을 때 또 다른 의미가 열린다는 점에서 창작물은 공산품과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모든 창작물은 공공재다. 세상에 나서는 순간 내 작품은 더 이상 내 작품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량한 창작물을 몇 편 내 놓은 후에 알게 된 나는 文學使用後期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편의 평론을 쓰게 되었고 누군가가 써준 그 평론의 사용 후기를 거쳐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쓰고 있다.

창작과 평론 사이에 선후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창작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창작물을 논하는 평론이 성립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앞에 놓인 것이 ()”를 대표하고 뒤에 놓인 것이 (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착각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창작과 평론의 선후관계는 원인이 발생했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오는 인과관계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고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나는 이 당연한 것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 직접 펜을 들고 직접 평론을 써보아야만 했었다. 뛰어난 이는 자신의 이성만으로도 사물의 이치를 변별하고 보통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고 나서야 그 이치를 파악하고 못난 자들은 몸소 겪고 나서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알량한 평론 하나 써보고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는 나는 그나마 보통 사람의 범주에는 들어가는 것일까?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