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의 가부키(歌舞伎)
가부키(歌舞伎), 대중문화가 가진 힘(連載 제3회)
김인숙
가부키(歌舞伎)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는 일본의 대표적 공연예술이다. 도쿄나 오사카등의 대도시에는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가부키 전용극장이 있고, 이 극장에서 비싸고 호화로운 도시락을 먹으며 가부키를 즐기는 것은 일본에서도 꽤나 고급스러운 취미에 들어간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도 말했듯이 가부키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대중연극이며 출연자들의 성매매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세속적이었다. 그러므로 가부키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것들이 아니라 대중들의 시선에서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가부키가 다루는 공연 내용의 장르는 크게 시대물 (지다이모노:時代物)와 세화물(세와모노:世話物)로 나뉘어진다. 시대물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사극으로, 과거에 활약했던 무사나 왕조의 인물들을 다룬 이야기다. 일본은 군사정부인 막부가 오랫동안 지배했고 평화로웠던 에도시대(江戶時代) 이전에는 전국시대라고 불리는 100년 이상의 내란을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다 보니 가부키의 시대물에는 이런 전쟁의 역사가 반영된 작품들이 많다. 물론 가부키는 어디까지나 창작공연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도리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임의대로 왜곡되거나 재해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가부키는 당시의 대중의 취향을 충실하게 반영했었기 때문에 가부키의 시대물을 들여다보면 당시 일본인들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회적 심리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1719년에 처음 공연된 혼쵸산고쿠시(本朝三国志)라는 작품을 보면 모쿠소(木曾)라는 조선군 장군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바로 임진왜란 삼대대첩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 전투를 이끌었던 진주 목사 김시민이다. 당시 육상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3만명이나 되는 대군이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3800명이 지키는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만여명이 전사하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모쿠소는 당시 김시민의 직책이었던 목사를 일본어로 발음한 것인데 이후의 작품에도 모쿠소가 등장하고 모쿠소가 단순한 조선 장군이 아니라 일본을 위협하는 원귀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 걸 보면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가 일본인들에게 준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부키가 아무리 서민들을 위한 대중문화라고 해도 관람료가 필요한 유료의 여가 활동이었다. 에도시대에 들어와 가부키가 대대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서민들이 여가에 쓸 돈이 수중에 남아있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평화로운 시대이면서 계급적으로는 미천한 신분이었던 상인이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게 되는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지방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방영주의 가족들을 지금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에 강제로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정책을 썼었다. 그리고 지방의 영주들로 하여금 격년제로 자신의 영지에서 에도까지 와서 일정기간 머물게 하는 정책도 시행했었다.
일본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영주가족들이 전부 에도에 머물고 있고 영주들 역시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가게 되면서 전국의 문물과 재화가 에도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인들이 일본 경제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이들이 얻은 경제적 여유가 가부키와 같은 대중문화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는 절대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사회경제적인 요소가 대중문화의 발달에 기여한다면 반대급부로 대중문화의 발달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를 보면 가부키에 관한 그림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얻었던 가부키 배우의 초상화나 지금의 포스터와 팸플릿에 해당하는 가부키 광고 전단이 우키요에 판화로 만들어져 대량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가부키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고 가부키에서 다루는 극의 내용은 사람들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예가 바로 츄신구라(忠臣蔵)라는 작품이다.
츄신구라는 아코사건(阿衡事件)이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진 가부키다. 1701년 아코번의(赤穂藩) 번주(蕃主),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가 에도성(江戶城)에서 막부의 관료인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당시의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의 분노를 사서 할복자결하고 아코번은 해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사건의 책임이 키라 요시히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다이묘(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47명의 아코번 무사들이 키라 요시히사의 자택을 급습하여 키라 요시히사의 목을 베어 자신의 주군이었던 아사노 나가노리의 영전에 바친 후 전원이 할복하여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의리와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사무라이(武士)의 귀감으로 여겨지며 구전되다가 가부키로 만들어지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츄신구라의 원작은 가부키지만 영화나 드라마로도 수차례 리메이크 되어 츄신구라가 TV에 나오지 않고서는 일본의 연말연시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마치 성룡 영화 없는 우리네 추석연휴가 허전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할 말이 많다. 실제로 두 고위 무사간의 충돌이 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자결한 주군을 위한 복수전이 있었지만 역사적인 시각으로 그 내막을 따져보면 그 복수의 동기가 츄신구라에서 그려지는 충성과 의리가 아닌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츄신구라는 아코사건이라는 실제 역사를 일본 대중들이 바라보고 싶은 시각에서 편집하고 각색한 창작물에 불과했지만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츄신구라에서 그려진 내용을 아코사건에서 일어났던 일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들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무사도라는 것은 사실 실체가 모호하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무사다운 것이고 유사시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명예를 지키는 것인지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츄신구라는 무사란 주군에 충성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명예로운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그저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서 과거에는 이런 무사도의 덕목을 지키는 참된 사무라이들이 있었다는 이미지 전파까지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 역사가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사람들은 가부키가 보여주는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대중문화의 작품이 일반인들의 의식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일본에서는 가부키가 일찍부터 증명했던 셈이다.
막부(幕府)도 가부키가 가진 이런 사회적 잠재력을 일찍 간파했던 것일까? 막부는 다양한 구실을 붙여 가부키를 검열하고 탄압했다. 이전 글에서 얘기했던 가부키 배우들에 의한 성매매와 풍기문란에 대한 단속도 사실은 그걸 구실로 내세웠을 뿐 관주도로 가부키 업계를 제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시각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가부키는 에도시대 전반에는 성매매 등의 풍기문란과 후반에는 무대의상이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단속을 당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츄신구라도 막부 입장에서 보면 대중들이 막부를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내용을 갖고 있었다. 누구의 책임인지도 불분명한데 중앙의 막부 관료대신 지방의 영주를 자결하게 만든 막부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영주와 다툼이 있었던 막부 관료의 목을 벤다는 내용부터가 반막부적(反幕府的)인데 츄신구라에서는 이들의 행동을 무사도의 귀감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막부에서 문제를 삼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가부키 업계에서는 이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1748년, 카나데혼츄신구라 (仮名手本忠臣蔵)라는 작품을 따로 또 만들어낸다. 내용은 츄신구라인데 시대적 배경을 에도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로 바꾸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전부 가공으로 이름으로 바꾼 작품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본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 인물명 등은 실재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밝힙니다.”를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서 선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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