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11. 신남역 (제2회)
- 유정의 사랑
춘천시에서 복원한 김유정 생가에 있는 기념관 안으로 들어선다. 그에 관한 여러 자료와 기록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이 불우한 청년으로 하여금 삼년이란 짧은 기간에 삼십여 편이나 되는 절규에 가까운 단편 소설들을 쓰게 했단 말인가. 나는 여기서 그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의 십대손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정은 연희 전문에 유학하던 중 권번의 기생인 다섯 살 연상의 박녹주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어려서 여읜 어머니를 닮은 그녀는 유정에게 있어 단순한 연정 이상이었던 것이다. 본래 소심하고 심한 말더듬이었던 그는 직접 만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일백 통에 가까운 구애의 편지를 쓴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매정한 무응답뿐이었으니 그가 남긴 글 ꡐ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져도 그 님 한번 보고지고ꡑ에서처럼 꺼져가는 희망에 절규한다. 두 번째 여인은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 박용자였는데 잡지<여성>에 함께 글을 발표한 인연으로 삼십여 통에 이르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녀 역시 답장 한 번 없이 유정의 친구인 김환태에게 시집가고 만다.
흔들리는 야간버스 안에서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저장된 이름을 하나 지운다
내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밤차는 서는 곳마다 종점인데
더듬거리며 어디에도
내리지 못하는 내 사랑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에
넘어지네
일어나지 마라
쓰러진 몸뚱이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너의
아픔마저 익사할 때
그리하여
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
너의 무덤 속일 때
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
그러나 잊지 마라
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유정에게 도시의 네온사인은 더 이상 휘황한 불빛이 아닌 탄식의 덩이가 깨어지는 암흑의 무덤 속이었을 것이다. 고문과도 같은 짝사랑의 열병과 재산 문제로 인한 형과의 불화 그리고 절망적인 폐병이 그로 하여금 조급한 글쓰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특히 폐결핵이란 병마에 그는 개인의 고독한 사랑의 윤리적 심판을 의탁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과 작품과 요절이 주는 보편적 집단의 신기에 최면되어 유정이 고뇌와 인간적인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마지막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창백한 손을 들어 허방 짚었을 때조차 손가락 사이에서 놓지 않은 그의 펜을 저 차가운 소양강 가에 거꾸로 세워두고 저마다 나약한 사랑의 심판자가 되어 김유정식의 사랑 병을 자신들에게 선고한다.
기념관과 나란히 있는 생가로 발길을 돌린다. 삶의 모방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하게 한다. 그러나 창조는 놀라움을 요구한다. 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곳의 풍경들은 우리나라 근대 풍속의 이미지적인 모방이 아닌 놀라운 창조물이어서 그의 시같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이 생가에 들어서자마자 유정의 회화의 소재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행객 자신은 이 거대한 그림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이나 도구로서 단순히 재현되거나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됨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경악한다. 유정의 생가는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 사각형의 겹집으로 된 가옥 중앙에 장방형의 어두운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엔 불안한 구름 떼가 그의 산문처럼 불규칙적으로 흘러간다. 나는 그가 미치도록 소유하고 싶었던 것들과 좌절과 증오의 실체를 저 구름으로부터 읽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상상력의 편파성을 제거한다. 유정은 좌절과 증오의 적대적 대상들을 이 어두운 공간에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밀실에 가두고 때로는 그 곳에서 자신만의 우연한 휴식처를 발견해내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가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이 어두컴컴한 밀실에 갇혀 아늑함을 누릴 때, 그의 운명이 벽 뒤에 숨어 진저리칠 때 그의 집은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집단 무의식의 존거지(存居地)였으리라. 이 집단 무의식 속에서 보호받았을 그의 들병이와의 자학적인 내밀한 사랑과 절망을 나는 기꺼이 추억한다. 나의 추억 속에서 그의 사랑과 절망은 두꺼운 벽의 틈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아서 그의 고독한 영혼을 구석구석 환하게 비춰주는데 유정의 영혼은 그의 단편들 속에서 슬픔과 절망이 구체화된 화석으로 남아있다.
신남역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의암호수가에 있는 김유정 문인비(文人碑)를 찾는다. 만년필 펜 끝 같은 비석 위로 이따금 오리 떼가 날아올라 몇 차례 허공을 순회하고 차가운 수면 위에 추락하듯 내려앉는다. 눈부시도록 하얀 그의 펜 끝으로부터 그가 꿈꾸었던 사랑의 우주를 향해 비상한 유정의 여인들에 대한 순백의 집념은 삼악산의 아득한 그리움의 절벽에 부딪히거나 결빙된 호수 면의 백치미의 여성성에 역반사하며 깨어지고 소멸된다. 유정은 그렇게 처연한 사랑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의 끝을 보기 위해선 유정의 풍경 은밀한 곳을 엿보아야 한다. 문인비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삼악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 가파른 절벽에 요염하게 서 있는 핑크색의 삼악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상당량의 책들과 음반들 그리고 예쁜 사진들이 걸려있는 산장의 내부는 신혼 살림방을 연상케 한다. 호수 쪽을 향한 두 개의 커다란 유리창은 마치 구도자의 벽면과 같아서 세상이 훤히 내다보이는 영혼의 비밀 감옥 속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미모의 산장 아가씨가 단조로운 강원도 사투리로 들려주는 이곳의 풍광 이야기가 김유정의 이야기로 넘어갈 때 나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원초적 남성성이 박녹주의 단가 ꡐ진국명산ꡑ의 중모리 장단으로 요동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유정과 녹주의 환영이 내 달팽이관 깊숙이 엄습해온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고행과 망각하는 타협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고 절름거리기 전에 신남역의 희미한 간판을 찾아야 한다.
김유정식의 사랑병에 가슴을 다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열차에 오른다.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해보지만 오히려 정신이 맑아온다. 귓속에선 실레마을의 산골 물소리와 빈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메타포가 우리 인간의 운명에 대해 뭐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자연의 언어를 비속하고 해학적인 실레마을의 토속어들로 이해하는 원시의 사상가가 되어 저녁놀을 음미하며 느릿느릿 달리는 철마에게 소리친다. ꡐ너 게으른 탐미주의자여, 가서 흘러간 것들에 말하라. 유정의 사랑의 슬픔이 너무 컸기에, 절망이 너무 깊었기에 나는 그의 문학 세계 안에서 지금 행복하다고.
'추억의 간이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이 문을 닫습니다. (0) | 2016.04.22 |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신남역 (제1회) (0) | 2016.04.22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도계역에서 영월역까지 (제2회) (0) | 2016.04.22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도계역에서 영월역까지 (제1회) (0) | 2016.04.22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군산역(제2회) (0) | 201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