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의 가부키(歌舞伎)
가부키(歌舞伎), 두번째 장의 그 남자(連載 제2회)
김인숙
일본사람들이 쓰는 표현 중에 니마이메 (二枚目) 혹은 산마이메 (三枚目) 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풀이를 하면 2장째 혹은 3장째라는 얘기인데 이게 무슨 뜻일까? 18번이라는 관용구처러럼 니마이메와 산마이메 역시 가부키에서 쓰이던 용어다. 통상적으로 가부키 극장 앞에 세워놓은 간판이 8장인데 둘째 장의 간판에 잘생기고 섹시한 걸로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셋째 장의 간판에 웃기면서 재미있는 배우의 이름을 써놓는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일본에서 니마이메는 잘생긴 미남자를 산마이메는 유머감각이 있는 익살스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요즘 젊은 세대의 일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사람들은 관용구처럼 자주 썼던 말이다.
둘째가 있고 셋째가 있으면 당연히 다른 순서도 있는 법. 다른 장에는 무슨 뜻이 있는지 잠깐 살펴보자면 이찌마이메(一枚目)라고 불리는 첫째 장의 간판엔 그날의 주연배우가, 네번째 장에는 극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중견배우, 다섯번째 장에는 주인공의 라이벌인 악역, 여섯번째 장에는 악역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일곱번째 장에는 모든 나쁜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역의 최종 보스, 마지막인 여덟 번째 장에는 공연을 총괄하는 좌장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를테면 이 여덟장의 간판이 요즘 영화의 끝자락에 나오는 엔딩크레딧 같은 역할을 했던 것.
악역이 한 명도 아닌 세명으로 서로 다른 특성과 캐릭터를 가지고 나뉘어져 있다는 게 재미있는데 그만큼 가부키의 각본이 대중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자극할 수 있는 내용과 구성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극의 주연인 첫번째 장, 이찌마이메가 가장 중요할 법도 한데 세간에서 유명해진 말은 역시 미남자를 가리키는 니마이메였다. 왜일까? 구성상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연기력이 뛰어난 주연 배우일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가부키 기획자들은 얼굴 마담의 중요성을 일찌기 간파하고 있었다. 외모가 뛰어난 두번째 배우를 배치해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 줄 알았다. 이런 전략은 현대 엔터테인먼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비쥬얼 센터, 미모 담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요즘 자주 이야기가 나오는 연예인들의 성적대상화의 문제. 이 역시 몇 백년전의 가부키 업계가 이미 안고 있었던 문제였다.
앞서 쓴 글에서도 얘기 한적 있듯이 여성 배역 역시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지금의 가부키와는 다르게 초창기 가부키 공연자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성적 욕망, 성상품화의 대상이 되자 위정자들은 풍기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이 가부키 무대에 서는 것을 금지시켜버렸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것이 잘생긴 미소년들로 무대를 꾸리는 와카슈(若衆) 가부키인데 이들의 등장은 배우들을 향한 성적욕망을 억누르기는 커녕 수요층을 더 확대시켜 버렸다. 단순히 여성을 원하는 남자뿐만 아니라 남색 취향을 가진 남자와 여성들까지 가부키배우의 성적대상화에 나서게 된 것.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일본의 민예품중에 우키요에(浮世絵)라고 불리는 판화가 있다. 부드러운 재질의 목판을 조각도로 파낸 후 지금의 스크린 인쇄를 하듯 여러 색을 찍어내는 기법으로 만들어내는 그림인데 예술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다른 미술품들과는 달리 우키요에는 철저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풍경화가 들어간 명승지 안내 서적이나 삽화가 들어간 백과사전, 가게의 광고전단 등, 우키요에의 쓰임새는 다양하고도 실용적이었다.
이 우키요에에서 가장 수요가 많았던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인기 가부키 배우들의 브로마이드였다. 청소년들이 방에 아이돌 그룹 멤버의 포스터를 한 두장씩 붙여두는 풍경이 일본에선 이미 몇 백년 전부터 익숙하던 장면이었다. 그렇게 그림으로라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존재. 그게 바로 가부키 배우들이었다.
미소년들 마저도 풍기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되자 막부(幕府)에선 그 마저도 금지시켜 버리고 지금의 성인 남자배우들에 의해 공연이 진행되는 야로가부키(野歌舞伎)가 정립이 되었지만 가부키는 이미 가장 강력한 미디어로 성장하고 난 후였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가진 연기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였고 배우들의 옷차림이나 말투가 시중에 유행될 만큼 파급력도 컸다. 선망을 넘어서 이들에게서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나곤 했다.
1714년 에도에서는 커다란 소동이 일어난다. 쇼군(將軍)의 부인과 측실((側室)들이 사는 오오오쿠 (大奥) 소속의 에지마 (江島)라는 고위 시녀가 이쿠시마 신고로 (生島新五郎)라는 가부키 배우와 밀통을 했다는 의심을 사게 된 것이다. 오사카(大阪) 출신인 이쿠시마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장법과 연기로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던 배우였는데 절에 참배를 갔던 에지마가 이쿠시마의 소문을 듣고 그의 공연을 보러 간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쿠시마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에지마는 무대 뒷풀이 파티에도 참석하게 되고 이 때문에 오오오쿠의 귀가 시간에 는게 된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에지마는 이쿠시마와 밀통을 했다는 혐의를 쓰게 되고 이쿠시마는 지금의 나가노 시(長野 市)의 미야케지마(三宅島)라는 곳으로 유배를 당하는 형을 받게 된다. 가부키 배우가 은밀히 성을 사고 판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고위 관직에 있는 여자와 가부키 배우가 얽힌 스캔들은 처음이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만의 스캔들로 끝나지 않았다. 오오오쿠의 수많은 관계자들이 문책을 받았고 막부는 이쿠시마가 몸담고 있던 극단마저 폐업시켜버리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오오오쿠 내의 권력 암투 때문에 에지마와 이쿠시마가 누명을 쓴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런 음모론적 수법에 동원되었다는 얘기가 나와도 사람들이 수긍할 정도로 당시의 가부키 배우들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일까? 지금의 일본 연예계에서도 가부키 배우와 염문은 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혼의 가부키 배우가 다수의 여성들과 열애설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결혼을 한 남자배우 역시 불륜설에 휩싸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가부키 집안 중에 최고 명문인 이치카와(市川) 가문의 후계자인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藏)는 결혼하기 전까지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염문을 일으키고 혼외자까지 둔 일본 대표 바람둥이였고 나카무라(中村)( 가문의 좌장인 나카무라 시칸 역시 2016년에 교토(京都)의 30대 게이샤(藝者)와 불륜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사죄 기자회견을 열어야 했었다.
치정과 불륜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시선이 차갑다.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유독 가부키 배우들의 바람기에 대해서는 일본사람들이 비교적 관대하다는 것이다. “가부키 배우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더 재미있는 것은 가부키 배우들의 윤리의식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키 배우는 매력적인 남자이기 때문에 바람기는 어쩔 수 없다.”, “가부키 배우가 바람을 피우는 건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리엔(梨園)의 아내들은 남편의 바람기 정도는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야한다.”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 사람들은 바람기를 가부키 배우들의 “종족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다른 분야의 유명인들이라면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을 불륜이나 혼외자 소동이 일어나도 가부키배우들은 왕성하게 활동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는 용인되기 힘든 일인데도 유독 가부키업계만은 그렇다. 그들의 아내가 살고 있는 리엔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세상인 것처럼 그들이 일하는 가부키 업계 역시 다른 시대, 다른 세상 속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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