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별곡역 (제 3회 )

김인숙로사 2016. 2. 3. 22:54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별어곡역 (제3회)


사진<네이버 포토앨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무인(無人)의 역사(驛舍) 앞에 선다. 간이역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독자적인 상상력의 소산으로 재탄생하는 새로운 이미지다. 이 독자적인 상상력은 과거 경험 속의 어떤 대상이 갖는 이미지와 잠재의식이 상호 작용하는 현상 그 자체의 한 과정이다. 지난 70년대에 그 누가 쌓아올렸는지 모르는 붉은 벽돌들이 갖는 실용적인 목적과 지금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나무의 생물적 욕망 한 가운데서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다만 어깨위로 흩날리는 꽃잎들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어머니의 뱃속 같은 아늑함에 감싸일 때 처음으로 존재감을 느끼고 어느 머언 미래의 길목에서 추억해야 할 현재의 어떤 이미지를 저 희미하게 퇴색한 벽돌로 기억한다.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뭔가 적어 본다. 그러나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이곳의 풍광과 교감하는 나의 언어 이전의 무엇이 기껏 문단 선배들의 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검은 하늘에 꽃잎들이 하나둘씩 반짝이는 별처럼 들어가 박히고 어렴풋이 빛나는 두 줄기의 철로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은하의 물줄기처럼 그리운 것들을 갈라놓으며 흐른다. 다시 철로 위로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꽃잎들의 무질서는 이 무인(無人)의 역사(驛舍)와 나 자신이 결합해 재탄생하는 하나의 자유로운 그리움의 질서다.



벚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 서넛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두 임금을 섬기기가 싫어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떠나는 길이, 들어오는 길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들,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들도 벚꽃이 후끈 만발한 철길을 열차가 지나가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뜨거운 열병을 앓는다. 그러면 벚나무들은 그 열병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꽃잎의 차고 알싸한 속내로 그들의 뺨을 어루만져 주고 어느덧 산골의 짧은 봄날은 지나간다. 철로가 휘어지는 플래트홈 가에 벚나무 하나가 과거로 흘러가는 구불구불한 시간을 비쳐주듯 꽃잎이 흐드러진 가지를 등불처럼 나지막하게 드리우고 서있다. 인접한 산비탈 밭에서 철 이른 김을 매는 할머니의 호미 끝 작은 돌멩이가 그녀의 유년 어느 시절로 굴러가는 뒤안길을 환하게 비쳐주고 있는 것이리라.



아우라지 행 다음 열차가 들어오기까진 한나절을 더 기다려야 한다. 외딴 간이역에서의 기다림이란 어디론가 가기 전에 먼저 오는 그 어떤 감정이다. 그 무엇인가가 가슴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와 마음의 해변 가를 철석이다 썰물처럼 일순간에 빠져나갈 때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 뿐만 아니라 산골역의 정적마저 휩쓸어가는 가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완벽한 적막에 갇혀 숨 쉬기 조차 어렵게 된다. 무엇에 쫓겨 먼 길을 돌아왔는지, 나는 적막 속에 숨어 헐떡이는 짐승처럼 숨소리 참을래도 들리는 것은 숨소리뿐인데 창 밖의 꽃잎들은 떨어진다. 바람도 없는데 저희들끼리 멀어지는 봄날의 여정 안에서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사진 <문관철> 사진작가


아이들 몇 명이 철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논다. 아무도 아이들의 위험을 경고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철길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선조 때부터 정지한 세월의 벽을 횡단하며 과거와 현재의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대합실로 들어간다. 문 하나만으로도 한 세상인 대합실, 의자도 그 흔한 사진도 그림도 한 장 없이 휑뎅그렁한 쓸쓸함만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 나는 서 있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왔는가. 유리병 안으로 들어온 물고기처럼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나가는 길은 나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막연한 그리움의 요구를 비정하게 거절하는 일이다. 낙서들로 가득 찬 대합실의 벽은 더 이상 내 추억의 일기장이 아니다. 저 얼룩진 유리창은 내 추억의 거울이 아니다. 펼쳐보지 말자. 들여다보지 말자. 좁은 산골에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철길이 잠들기 전에 이 숨 막히는 공간을 빠져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