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별어곡역 제 2 회
열차가 좁은 골짜기로 파고든다. 어디선가 여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소녀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가위바위보를 하며 놀고 있다.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에 승객들 몇은 엷은 졸음에서 후다닥 깨어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스르르 눈감아 다시 어설픈 잠에 빠져들 때 열차는 산모퉁이로 돌아든다. 여기선 잔설을 밟고 가는 바람의 길도, 열차가 울먹이며 오르는 언덕길도 고개 넘으면 모두가 꽃그늘인데 모퉁이마다 개나리는 또 피어 누구를 기다리는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다. 이따금씩 보이는 폐광의 입구들은 권좌에서 쫓겨난 맹수처럼 한 세기의 가장 후미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헛된 포효를 하듯 지나가는 열차의 바퀴소리를 으르렁거리는 메아리로 돌려보낸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다만 늙은 민둥산의 빈 울림쯤으로 생각해버리고, 나는 말 못할 그리움에 목이 메는데 자꾸만 따라오는 수면제 알약 같은 낮달은 제 희멀건 기억을 누구의 그리움과 견주어보겠다는 것인지, 바람과 열차와 사람이 하나의 세월로 흘러가는 깊은 골짜기를 또 한 생애가 꾸벅꾸벅 흘러간다.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발등에 떨어지는 봄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한 소녀를 생각한다.
햇볕 따뜻한 봄날
발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
그 곳에 작은 웅덩이 패이고
소년 시절 나를 설레게 했던
방앗간 집 딸의 희고 고운 종아리에 머물던
햇빛이라든가 내가 뻔질나게 지나다니던
그 집 앞 길이 반들반들 고여
어디론가 흐르는 소리 들리는데
소녀의 방 조그만 창이 파리하게 앓던 가련함과
우리 집 울타리 아래 핀 민들레 꽃씨들이
그 가련함 어딘가에 터를 잡던 교묘함까지도
발목을 지나서나 허리를 지나서나 한없이
일렁이는 소리로 듣게 되니 어쩌다 그 애와 마주칠 때
파르르 떨던 눈빛은 물컹한 가슴에
어느 무늬의 물결로 밀려오시려나
열차가 별어곡에 들어선다. 열차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지켜보며 울었는지 목이 쉬어 기적조차 울리지 못하고 그냥 멈춘다. 휑한 역사(驛舍)엔 역무원도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대합실 벽에 걸린 열차 시간표가 이곳이 기차역이란 것을 말해 줄 뿐이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별어곡, 이름이 의미하듯 이곳은 이별의 고장이다. 그 옛날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를 섬기던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서 바라보면 이곳은 이별 안이고, 이별 안에서 바라보면 이곳은 세상 밖이다. 이별은 별어곡 안에 있으면서 별어곡 밖에 있는 것이다. 여기로 들어오는 사람, 여기를 떠나는 사람 모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진짜 이별을 하려거든 별어곡으로 오라. 여기선 그리움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텅 빈 역사에 가만히 서 있으면 멀리서 열차가 구슬픈 기적을 울리며 들어올 때 그리움은 테러리스트처럼 과거로 향한 어느 길목에 숨어 기다리다 갑자기 온몸으로 엄습해 온다.
'추억의 간이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홍배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치악역에서 반곡역까지 (제2회) (0) | 2016.04.09 |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2) / 치악역과 반곡역 (제1회) (0) | 2016.04.09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별곡역 (제 3회 ) (0) | 2016.02.03 |
배홍배 시인과 함께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1> / 별어곡역( 제 1 회) (0) | 2016.02.03 |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0) | 2016.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