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영시집 『흙의 연대기』 詩評
커피의 해악을 반나절 쯤 나열한다 해도 오후 네 시는 그렇다
김인숙(시인 평론가)
고백컨데 어려운 글을 쓰려고 작정하는 때가 있다. 글 사이 단어들도 괜히 영어, 아니 요즘은 영어 단어의 뜻 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니 괜히 발음도 어려운 프랑스어, 독일어를 동원해서 글을 장식하려는 때가 있다. 이럴 때의 목적은 두가지다. 첫째는 어디 가서 잘난 척 하고 싶을 때, 두번째는 뭔가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데 사실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를 때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디서 줏어 들은 단어를 늘어놓기만 하면 되고 이때문에 발생하는 뭔 말인지 알아 먹을 수 없는 문맥은 형이상학적이라는 표현이라고 우기면 된다. 글쟁이로서 당연히 해서는 안되는 짓이지만 다시 한번 고백컨데 이제까지 그런 짓을 많이 해왔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안 그러겠다는 다짐도 못하겠다.
그래서일까? 쉬운 말 쉬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존경심을 갖고 있다. 글의 의미를 함축시켜야 하는 시인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면 나의 존경심은 무한한 경외심으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버린다.
쉬운 글이란 결코 단순하거나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만만한 글이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 글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때, 듣는 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장 빨리 이해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을 때 나오는 글이 바로 쉬운 글이 다.
참으로 부럽게도 구수영은 시어를 쉽고 간결하게 다루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시인이며 [흙의 연대기]는 시인이 이런 능력을 보란 듯이 뽐내고 있는 ‘얄미운’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구수영은 어려운 말로 형이상학적 유추나 해석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앉은 친구가 그날의 소회를 담담하게 털어놓 듯 하고픈 말 몇마디 툭 던지고서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대신 그녀가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쓸데없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은 읽는 이들의 몫이다. “당신이 또렷한 목소리로 그 커피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여러 개의 해악을 반나절 쯤 나열한다 해도 오후 네 시는 그렇다 – 쓸쓸한 위로” 그녀가 엮어 놓은 여러 편의 시 중에 내 눈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한 문장이다. 열번 백번을 읽어봐도 특별할 것 없는 한 줄의 글이지만 커피와 오후 네시라는 두개의 단어만으로도 구수영은 삶의 피로와 그것을 구원해 줄 작은 위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수사도 필요없고 거창한 설명도 필요없다. 그저 그녀와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못 본 사이 훌쩍 나이 든 큰딸의 무너진 잇몸을 보며 우리 집안 내력이라고 웃겠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된다고 웃겠지 – 그늘의 순서”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감정은 먼저 떠난 것에 관한 그리움, 그리고 먼저 떠난 것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버린 내 자리를 되돌아봄이다. 십중팔구 신파조의 넋두리나 후회의 연대기가 되기 십상인 테마지만 쉬운 말을 제대로 들려줄 줄 아는 구수영의 능력은 그런 실패를 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 머리에 염색약을 발라준다. 오징어 먹물이 오래가더라. 봄 눈은 아무리 많이 내려도 그만이야. – 봄산” 오징어 먹물과 봄 눈이라는 겨우 두개의 단어로 두 사람이 살아낸 그 세월을 이토록이나 헛헛하게 잘도 그려내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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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숙
* 2012년 月刊 『現代詩學』 詩 등단
* 2017년 季刊 『시와세계』 評論 등단
* 2013년 제6회 『한국현대시협』 작품상 수상
* 2015년 제7회 열린시학상 수상
* 2020년 제5회 『한국문학비평학회』 학술상 수상
* 2020년 제18회 서초문학상 수상
* 2020년 제22회 문학비평가협회상 수상
* 시집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2020년 月刊 『시인동네』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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