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간이역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아우라지역에서 구절리역까지

김인숙로사 2016. 4. 10. 08:02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4. 아우라지역에서 구절리역까지

-옥산장에서 바람의 역으로

 

정선은 산과 강의 고장이다. 산맥은 뻗음이 거침없으나 강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고 강줄기의 흐름은 오만하나 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거기 그대로 있음으로써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우리 산하의 품격을 보여준다. 아우라지의 길들은 가락과 리듬의 길이다. 이곳으로 모여드는 산들은 무 장단의 자유리듬으로 촘촘하게 봉우리들을 거느린다. 강물이 느리지만 장중하게 세마치장단으로 산자락들의 후렴을 돌아가는 것이나 빠른 듯 급하지만 내지르지 않는 물굽이에서 정선 아라리 가락이 태어나게 된 연유를 알 것 같다.

600여 년 전 조선 초기 불사이군 정신의 선비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그들의 한을 한시의 운율에 붙여 읊조린 것이 아라리의 유래다. 따라서 정선 아라리의 가락은 한의 어두운 울림을 지닌다. 그러나 아라리의 한은 스스로 깊이 침잠하는 병리 현상이 아닌 정신의 일부를 이루는 정서다. 강물 위를 청승맞도록 흐르는 아라리 가락은 사나운 물굽이와 싸우던 떼꾼들의 목구멍에서 누에고치 명주실처럼 풀려나온 현실의 암울한 풍경들이 과거 속으로 투기되는 특별한 의식 행위의 그것이다.  

 

 

아우라지역은 구절리 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임계 방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 아우라지 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아우라지란 말은 두 물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는 우리의 옛말이다. 열차가 끊긴 역은 화려한 수의를 입고 풍장을 당하고 있다. 초여름의 햇빛 속에서 바라보는 폐 역사의 겉벽에 그려진 아우라지 처녀의 붉은 치마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붉은 색은 색의 정점에서 세상의 모든 색을 거느린다. 주검을 땅 속에 묻음으로써 생의 소멸을 확인하는 매장과는 달리 풍장은 주검을 공중으로 산화시켜 지상에서의 생을 이어가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폐역사의 붉은 색은 죽어서 살아있는 상징적 의미 너머 세상의 모든 풍경을 영원히 발 아래 다스리려는 아우라지역의 거만한 함의가 햇볕과 바람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떠나간 역사의 내부는 건조한 공기가 차지한다. 마른 대기는 역사의 안과 밖 자연 공간을 중립적으로 포용하고 배척하면서 과거 이 역이 지닌 사회 공간으로서의 양면적 기능을 서서히 변형시켜 나간다. 강 건너 처녀상이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과거 지향적이라면 아우라지의 폐역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여울 속에서 시간의 이쪽과 저쪽의 삶 속으로의 자의적인 이동을 증거한다.

 

 

아우라지 역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현대 속에서 먼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오래되어 흐물거리고 말투는 어눌하다. 뭔가 입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함부로 걷는 모습이 랩송을 부르는 어린 가수들의 그것을 닮았다. 그들의 적당하게 안쪽으로 구부러진 팔자형의 다리와 그 끝에 아무렇게나 신겨진 신발이 지면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둔탁한 소리는 재즈의 스윙과 타악기의 파찰음을 연상시킨다. 그렇다, 그들을 키운 것은 정선 아라리의 가락과 장단이다. 여기서 듣는 모든 소리는 곧 음악이다. 버려진 레일을 두드리는 햇빛과 바람이 과거 흘러간 이야기를 현대적 랩송으로 풀어내는 청명한 음향으로 들린다.

여랑의 밤은 어둠보다 습기가 먼저 찾아온다. 본래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습기가 허술한 거리의 습윤함과 농도 차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어둠은 나의 내면과 검게 빛나는 아우라지 강의 죽음의 재현적 넌센스 사이에 합법을 가장한 문학의 배경으로 저만큼 떨어져 모호하게 서있다. 나는 서둘러 이 거리를 빠져나가야 한다. 오늘 하루 동안 이곳의 산과 강 그리고 이들 추상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모사가 나의 언어를 소진시키기 전에. 여랑에서 단 한곳의 여관인 옥산장을 찾아든다. 아니, 나의 피곤한 시선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여관의 간판이 스스로 내게 들어온다.

 

 

산장 주인인 전옥매 여사는 좀 특별한 여인이다. 저녁이 끝난 후 여관의 안채에 투숙객들을 초청하여 차를 마시며 그녀가 모아온 수석 이야기, 인생 이야기 그리고 정선 아라리를 들려주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미지의 신험스런 기운이 나를 아득한 과거로 이끄는 어떤 운명적인 힘이 느끼게 한다. 

 

 

방안 가득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돌들이 그녀의 설명에 의해 알레고리로, 상징으로 혹은 리얼리티로 각각 언어의 순환적 보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들 공간의 경계는 문학과 예술과 그리고 도덕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서로 스며들고 빠져 나오고 다시 교합하는 것인데 이 여행자의 뇌리에 각인된 얄팍한 현대 문명의 먹물이 여지없이 표백되어 나의 몸뚱이는 하나의 무색투명한 돌덩어리가 되어 간다. 정선의 역사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직접 부르는 정선 아라리는 입술 끝에서 불타 허공으로 사라지는 한 명창의 매끈한 가창이 아니라 그녀의 사지 먼 끝 모세혈관으로부터 발원하여 아랫배 깊숙이 돌아 나오는 아우라지 강의 거대한 물굽이다. 좌중 몇 사람은 이미 토착적인 상상력으로 신음하고 내 스스로 노랫말의 의미와 가락의 악음(樂音)이 주는 향수(享受)가 아닌 일종의 신비한 힘에 굴복 당하는 나의 전의식을 경험한다. 3시간 가량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는 사랑과 아픔 실패와 좌절, 고뇌, 질곡, 용기 그리고 희망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인생 역정에 내 모든 오염된 사상과 더러워진 체액이 한꺼번에 정화되는 느낌이다. 특히 앞 못 보는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선 그녀의 그윽한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면서도 입술은 묘한 평온함과 미소까지 비쳐 보이는데 측은지심이 현동하는 일종의 하이포 그램과 청중의 내포적 심리에 대한 배려까지 표상하는 실로 형이상학적인 여인이요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기차가 달리는 것은 일종의 언어 행위이다. 기차는 시골과 도시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아낙들이나 산채를 뜯으러 오는 중년 노인들 혹은 광부들을 삶의 현장에 내려놓는다. 그들의 잠재적 노동행위는 기호로서 존재할 뿐 이동이라는 의미 수행 수단의 도움 없이는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차가 들어가는 곳은 새로운 삶의 언어가 있고 삶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정선선은 1974년 강원도 내륙의 석탄을 수도권으로 운반하기 위해 건설된 노선이다. 구절리역은 이 선의 마지막 역이다. 이제 역은 앞서간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개념으로부터 탈피하여 바람의 역이라는 음향적인 울림으로만 남아있다. 역사 앞마당엔 쑥부쟁이 구절초 개망초 등이 어수선하게 자란다. 무책임하게 떠나간 시간들이 버린 망각과 노망의 자식들이다. 이들은 제멋대로 키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손바닥만한 이곳의 하늘을 재단하고 비틀어 마침내는 이 여행자의 자연에 대한 신비스런 공포감마저 치매의 머리카락처럼 쥐어뜯기고 헝클어지게 한다. 운행이 끊긴 녹슨 레일의 궤적은 구절리의 존재와 소멸이 공유하는 공간의 개념이다. 시간의 개념인 기차가 이 공간으로부터 일탈한 지금 폐허가 된 역사 뒤 숲에서 슬프게 우는 뻐꾸기는 또 하나의 구절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뻐꾸기가 우네

슬프게도 우네

뱁새가 품고 있는

꼼지락거리는 알 하나

그들은 지금 교신 중

원시림은 집단

무의식으로 서있네

입주딱지 같은 낙엽 한 장이

전부인 쓰러져가는 고목 안에서

조상이 물려준 삶의 암호를

양심의 깃털이 돋기 전

잔등에서 피가 나도록

견뎌낼 거라면 내

벌거숭이 몸뚱이를 내어주겠네

온 몸이 짐승의 털로 덮이고

귓속에서 검은 뿔이 숭숭 자라

저 울음의 메시지를

수신할 때까지

아픔은 나의 것이 아니니

아, 젊은 뻐꾸기들 날아드네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뱃속에 잉태한 태아가

물려받을 고통의 새 주소를 찾아  

 

 

구절리역 근처 가게 앞에 앉아있는 초로의 아낙들에게 강릉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밖으로 보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험난한 지형과 자동차의 기계적 역학 관계까지 소상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필경 도회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리라. 광부들이 떠나간 거리는 바람이 지배한다. 구절리에 들어온 모든 바깥 사람들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 장신구까지도 이곳에선 색을 잃는다. 오래된 벽화처럼 골짜기를 깎아내는 바람에 의해 풍화되고 마는 것이다. 풍화되는 것은 그들의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의식까지도 여서 이곳을 떠나는 순간 금방이라도 모래 언덕처럼 스르르 부스러져 내릴 것임을 그들은 잘 안다. 이제 사람들은 기차와 함께 사진 속으로 떠나갔다. 쓸쓸한 배경을 깔고 앉아 이따금 찾아오는 외래 여행객들을 향해 사진 속에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계곡의 척박함을 훑는 바람의 순수 이념이 제압하고 다시 제압당하는, 아직 그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삶의 퍼포먼스를 나는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