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廣場

季刊 『詩와世界』2015年 가을號 揭載 (네비게이션, 와이너리, <에스프리/ 나는 누구인가>

김인숙로사 2016. 1. 23. 00:11

네비게이션 外 1편/ 에스프리

 

김인숙

 

 

 

   장미꽃 붉은 담벼락이 허물어지는 그곳까지

   붉은 노을 번지는 지평선까지

   이 친절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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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층의 울음이 형광을 터트리면 나는 불나방이 된다 붉은 날개와 붉은 더듬이를 가진 아랫배를 물들여줘, 염색물이 끓어오르는 숲이라도 좋아 장미꽃 정오처럼 붉어질 거야 불꽃이 되어 불타는 내일의 한 자락도 잘라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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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드마크를 선뜻 넘어선 내비게이션. 나를 밝혀 줄 바싹 달궈진 붉은 입술과 붉은 머리, 구겨지는 변색의 한낮, 불세례를 퍼부어다오 날 선 더듬이로 내 달팽이관을 울리는 붉은 동그라미의 파장, 예민한 안테나를 높이 세워 한순간에 짐승처럼 나를 제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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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겨운 안내로

   점점 멀어지는 채도彩度로 가고 있는

   붉은 낭비의 초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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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

 

 

미치는 맛과 숙성된 맛은

같은 입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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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이 눌린 포도마다 해풍이 넘친다.

말씨름처럼 들끓고 있는

시간의 역류

으깨진 맛들이 향기로 합쳐지는 저장고는

얼굴을 넘어가는

붉은 노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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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있던 시간의 시음試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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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마개가 들어있는 나무들이

회오리를 풀면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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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숙성을 부추기는 만찬

지붕만 기웃거리던 볕이 꼬리를 거두어가고

한 가문의 지하에선

둥근 항아리들이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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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중심은

한 알의 포도껍질 속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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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의 아침 일과는

콧속의 점막과 대뇌 사이를 청소하는 것

혀와 입술을 닦는 것

검은 색깔의 밤을 맛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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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볕이 부채 살을 펼치는

어둠을 품평品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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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 나는 누구인가 -

 

 

러시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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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그 시간.

수많은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 계단을 둥둥 떠서 올라가다보면

문득 작은 고독과 허무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이 수많은 이들 중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이렇게 붐비는 광장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독한 나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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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숨을 내 쉬고는 다시 생각해 본다.

고독한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쁜 길을 재촉하고 있는 저들 역시

웃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시간을 걸어가고 있을 테니까.

결국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독의 껍질을 깨는 것은

내 스스로가 짊어져야하는 운명.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을 등에 진채 오늘도 군중 속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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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독의 껍질이 깨지는 순간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픈 상처의 틈새에서 시어를 끄집어내는 것

또한 시인이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다.

어쩌면 독하고, 어찌 보면 불쌍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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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그런 시어에 묻은 내 상처의 흔적을 닦아내고 있다.

어쩌다 올려다본 하늘은 장마를 머금어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그 아래를 걸어가는 우리들의 거리는 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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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넘쳐나는 고독들.

여전히 외로운 나, 그리고 사람들.

나는 오늘도 그들의 상처를 찾아 거리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