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論 世上

月刊 『시인동네』 2018年 連載 4月號 (하이쿠(俳句)는 그 옛날의 트위터였다. / 1회)

김인숙로사 2018. 3. 10. 04:41

하이쿠(俳句) 제대로 읽기 (連載)

 

하이쿠(俳句)는 그 옛날의 트위터였다.(1)

    

김인숙

    

 

 

          古池蛙飛こむのおと (ふるいけや かわずとびこむ みずのおと)

         <고요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첨벙>

    

  극도로 정제된 미의식의 세계. 일본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하이쿠라는 것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라는 이름의 詩聖이 있다는 것도. 세상에서 가장 짧은 라고 불리는 일본의 하이쿠는 열일곱 글자에 맞춰 쓰도록 되어 있는 의 한 장르다. 하이쿠에서는 다섯자, 일곱자, 그리고 다섯자로 이어진 운율에 맞춰 작문을 해야 한다. 그냥 글자 수만 맞춘다고 해서 전부 하이쿠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계절을 드러내는 詩語가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하고 詩句를 매듭짓는 語句를 집어넣어 17자를 하나의 완결된 문장으로 이끌어야 하는 형식의 엄밀성까지 가지고 있다.

이 짧디 짧은 일본의 시가 최근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짧은 문장 안에 응축된 시어를 담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미니멀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스타일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시아권 외에도 영어나 유럽어를 쓰는 나라에서도 하이쿠를 배우고 직접 써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열일곱자일까? 왜 일본 사람들은 굳이 한 문장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로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어령 선생이 그 옛날 설파했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일본인들은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과묵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이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원과 기원을 따지는 일이 그렇듯 이런 설들은 그냥 추측일 뿐 뭐 하나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나름대로의 추측 하나를 전개해 봐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상상하고 추리하는 건 공짜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가정 하나를 던지면서 시작해 보기로 하자. 하이쿠란 그 옛날 日本版 트위터였다. 그래서 열일곱다라고. 이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고 따지실 분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이쿠가 태어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게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절대 아니라고.

트위터라는 서비스가 인터넷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었다. 겨우 140자의 글자로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라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문단의 첫 글자로부터 이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아래아 한글로 확인해 보면 딱 140자다.

이 얘기는 트위터로는 위의 한 문단 정도의 의사표현도 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세상에 이토록 과묵한 SNS라니....

하지만 이렇게 제약이 큰 미디어인 트위터는 온라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유가 뭘까? 실제 트위터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트위터의 좋은 점으로 꼽은 가장 큰 이유가 다음의 두 가지였다고 한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서 더 좋았다.”

문장을 짧게 끝내야하기에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 트위터의 좋은 점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글이란 길고 장식적이며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미니멀한 이 시대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바로 트위터였다. 길게 쓰지 않아도 되고 글자수가 정해져 있는 만큼 나만의 축약된 표현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즐거움. 부담은 줄이면서 재미는 늘린다는 것이 트위터가 가진 매력이었다.

하이쿠의 탄생에도 이와 비슷한 배경이 있다. 물론 하이쿠는 트위터와 비교하자면 조금 심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40자도 버거운 판에 17자라니. 이건 해도 너무한 대략난감의 언어탄압이 아닌가?

트위터가 글자수를 제한한 것이 사용자로 하여금 긴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하이쿠의 열일곱자는 한두 마디의 풍자와 은유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자 했던 서민들의 필요에 의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서민들이 아무것도 없는 제로 베이스에서 어떤 형식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그들은 귀족들이 부르던 와카(和歌)라는 전통시의 한 구절 형식을 빌려서 하이쿠라는 것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7자라는 글자수는 이렇게 선택된 것이다.

하지만 글자수만 와카에서 빌렸을 뿐 그들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우아하게 자연을 노래하는 와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권력자를 조롱하기도 하고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전하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음담패설을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야하기 때문에 글이 길다. 하지만 대중들은 최대한 빨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야하기 때문에 글이 짧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의 귀를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강렬해야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돌려서 까야하기 때문에 저속한 풍자와 은유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이게 바로 하이쿠의 초창기의 모습이었고 당시의 사람들이 하이쿠를 짓고 읊어대는 모습은 지금 우리가 컴퓨터 앞에 앉아 씩씩대고 흥분하면서 폭풍 트위터를 마구 날리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금도 하이쿠에는 센류(川柳)라는 장르가 따로 있다. 전문 하이쿠 작가들은 열일곱자의 글자수와 함께 엄밀한 형식을 지키고 있지만 센류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는 대중 하이쿠다. 강가의 버들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센류는 그 이름만큼이나 유연하게 흐느적거린다.

매년 5월 일본에서는 제일생명이라는 보험회사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샐러리맨 센류>라는 공모전을 크게 연다. 말이 직장인 대상이지 사실상 누구나 참여해도 상관이 없는 이 국민적 센류 공모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를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풍자성이다. 다시 말해 그 옛날 하이쿠가 처음 나왔을 때의 대중적인 본모습을 현대적으로 이어가자는 취지인 것이다. 역대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것들을 살펴보기만 해도 센류가 무엇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プロポーズ あのにかえって ことわりたい

         <프로포즈여 / 그날로 되돌아가 / 거절하고파>

         タバコより  のグチ

        <담배보다도 / 몸에 더 해로운건 / 아내 잔소리>

        皮下脂肪 資源にできれば ノーベル

       <몸속의 지방 / 자원화만 된다면 / 이건 노벨상>

    

이런 센류 공모전이 따로 있다는 것은 하이쿠가 더 이상 대중들의 재치와 풍자를 대변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마쓰오 바쇼와 다른 유명 작가들이 예술성 높은 하이쿠를 선보이면서 하이쿠는 더 이상 시중의 음담패설이 아닌 정제된 미의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승화가 된다. 일본 밖에서 인식하고 기억하고 있는 하이쿠의 모습도 여기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하이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쓰오 바쇼는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엄청난 수의 팔로워들을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힘에 의해 지금의 하이쿠는 고고한 문학 장르의 일부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트윗이 전부 예술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름 모를 유저user들이 쓴 저속하고 날것 그대로인 트윗들이 인터넷의 바다에 넘쳐흐르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삶을 비춰내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하이쿠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열일곱 글자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을까 고민하던 이웃들의 모습. 하이쿠는 그 옛날의 트위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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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 * 2012月刊 現代詩學등단

            * 2017季刊 시와세계評論등단

            * 6한국현대시협작품상 수상

            * 7회 열린시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