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공전역 (제2회)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5. 공전역 (제2회)
-영화 박하사탕과 진소천
사람들은 누구나 만나고 헤어진다. 그곳이 도시의 공간이든 농촌의 전원이든 바닷가이든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한 번쯤 완행열차를 탄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속도는 너무 빨리 찾아오는 절망과 통속적인 눈물, 때늦은 후회보다 언제나 느리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간이역에 내려 까닭 없이 서성인다. 그들은 간이역에서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뭔가를 찾아 서성이고 다시 간이역을 찾는다. 잃지 않은 것을 찾으려는 것은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리운 이름마저 잊혀져갈 때 애틋한 마음들만 역 대합실의 낙서판에 갇혀 누군가에 의해 읽혀지고 기억되길 기다리는 곳 그곳이 간이역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촬영지 진소마을엔 역이 없다. 조치원에서 충북선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고 진소마을을 지나 공전역에서 내려 철길을 따라 2킬로미터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비는 완전히 그치고 하늘이 파랗게 갠다. 가방에서 구닥다리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건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서야 나는 음울한 관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리얼리스트 자연주의자가 된다. 렌즈는 대상의 이미지를 변형시킬지언정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하지는 않는다. 나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대상의 재창조가 아닌 변형 또는 변주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가 좋아하는 렌즈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구형 렌즈는 구면 수차 색 수차 등 왜곡을 완벽하게 잡아주는 현대식 렌즈와는 달리 적당한 왜곡으로 변형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눈앞에 스쳐 가버린 것들을 있는 대로가 아닌 기억의 필름 속에 저장해주는 이 감성적인 카메라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길과 나란히 흐르는 진소천을 카메라에 담는다. 진소천의 흐름은 자연을 거역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강과 하천이 그렇듯 심지어 시골의 실개천까지도 소비화 상업화 및 관료화 문명의 배경으로서 일정한 흐름의 형식을 강요당하고 있는데 비해 이곳의 물 흐름은 넘치며 흐르다가도 때로는 역류하고 포효하며 이곳을 찾는 인간 의식의 질서와 일관성을 금지한다. 물살이 급한 여울목에 할머니 한 분이 물 속에서 다슬기를 잡고 있다. 가난한 마을에 시집와서 평생 다슬기를 잡아 아들딸들을 키우고 가르친 저 할머니가 물속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물 밑바닥에 아롱거리는 도시로 떠나간 아들 손자들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굽은 등 너머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강 건너 미류나무가 수면 위로 쓰러진다. 물결은 나무의 그림자를 탓하지 않고 완행열차는 자신의 속도에 순응하며 풍경 속으로 끼어든다. 문득 막막한 비애가 엄습해온다. 내 의식은 이토록 편협한 것인가. 도시에서 멀리 나와 두고 온 나만의 비밀 공간에 대한 향수로 이미 음습한 권태에 빠져든 것인가. 물도, 먹을 것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기억하려는 노력도 없이 길 없는 천변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고독에 빠져들 때 지나가는 화물열차의 기적소리가 나를 고독의 절정에서 끌어내린다.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지 30분이 지나 진소마을에 도착했다. 진소마을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속한 작은 산골 마을이다. 한 때 20여 가구가 살았던 이 마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물이 마르지 않는 깊은 못이 있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자 못 주인은 못을 매워 버렸는데 그 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못 주인도 가세가 기울어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네 가구가 남아 하루 몇 차례씩 희고 반짝이는 레일 위를 열차가 지나가며 구슬프게 울 때 낡은 지붕의 양철 추녀 끝이 부서지는 햇빛 속에서 전율하며 허무를 노래할 뿐 마을은 온종일 적막에 싸여 있다.
나는 화물 열차가 튀어나오던 터널 속을 노려보며 영호가 생을 마감한 철교 위에 서 있다. 그의 죽음의 그림자가 달리는 지상의 가장 환한 어둠이 터널 내부로부터 흘러나와 철교 위에 깔리기 시작한다. 열차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일용 노동자들, 시멘트 회사 노무자들, 열차의 기사들, 이따금 찾아오는 낚시꾼 같은 산 사람들은 그의 망령이 아침저녁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서 활활 타오를 때 영화의 엑스트라 같은 자신들의 삶에서 이탈하여 저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들의 생은 하나의 순간으로 공유될 뿐 열차가 철교를 지나고 나면 허공에서의 순간이 얼마나 지루했는지 깨달으며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철교아래 유유히 흐르는 물결은 영호 자신의 파탄 난 삶에 대한 저항적 폭력 배후로서의 거추장스러운 삶의 이념이듯 철교의 교각을 휘감고 또 휘감으며 그들의 이념의 혼돈 속으로 흐른다. 영호가 세상이 자신을 버렸음을 알았을 때, 그의 희망마저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했을 때, 심지어 절망마저 거추장스러워졌을 때 박명의 시간의 기억 속에서 그를 손짓하며 기다리던 진소천의 철교 위에 나는 서서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영호의 기쁨 안에서 진저리친다. 발바닥을 통해 레일의 진동이 전해오기 시작하고 귀청을 찌르는 위협적인 기적소리가 목가로 들린다. 공포도 지나치면 평화가 되는가. 짐승은 죽을 때가 되면 처음 태어난 곳을 찾는다.
사람도 희망에 지치거나 죽음에 이르면 처음 희망을 가졌던 곳이나 그가 태어난 곳을 찾는다. 그의 순수한 기억이 묻혀있는 장소에서의 망각에 이르는 시간은 평생 동안 그가 가졌던 기쁨의 시간보다 훨씬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선로 보수 작업을 하던 인부가 깜짝 놀라 뛰어와 내게 소리소리 친다. 나는 마음속에서 영호가 내던진 마지막 말이며 세상에 던진 첫 번째 말인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철길 가 낡은 가옥의 앞마당에 피어있는 봉숭아처럼 영호 자신에 대한 극도의 환멸감으로 자신을 건드리는 모든 것들에게 언제라도 비열하게 자신을 폭파시켜 방어하려는 적의에 스스로 몸서리칠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 저 진소천은 영호의 자학적인 성격을 옹호하듯 자신의 내부 밑바닥을 훑고 또 훑어 앙상한 회한의 덩이같은 돌덩이들을 여기저기 불쑥 내밀고 있다. 그 위에 위압적으로 서있는 철교의 교각이 흩어지지 않고 고여 있을 그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듯, 오만과 긍지가 혼합된 고성의 성벽처럼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음울한 이미지로 떠올라 그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끝없이 초월하여 나의 내부로 스며들어올 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것은 이제 곧 어둠 속에서 반짝일 별 떨기들과 개똥벌레들의 희미한 인광 속에 숨어 있는 영호의 영혼 깊은 곳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까. 오, 완벽한 암흑 속에서 별빛과 하찮은 곤충들이 인도하는 순례의 길 앞에 서있는 기쁨에 충만한 내 영혼의 떨림이여! 그의 가엾은 영혼은 저 80년대 암울한 군부독재 폭풍의 벼랑에 양심의 갈기를 휘날리며 서 있다. 그의 영혼 속을 밝히고 있던 한 자루의 촛불마저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리고 양심의 갈기는 유령의 망토처럼 자신을 휘감는다. 영호의 삶은 암흑 속에서 그가 내딛는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거대한 석실 무덤 안을 걷는 것과 같아서 멀리 몇 채 남지 않은 진소마을의 허름한 가옥들의 창이 압도적인 어둠에 제압당해 이따금 흘리는 빛이 암흑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폭력적이고 추잡한 것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할 때 그의 영혼은 다만 죄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태양은 떠올랐다. 이곳에서 지난날은 한여름의 끝 거미줄에 매달린 곤충의 말라버린 날개로 회고될 뿐이다. 강바닥의 자학적인 돌덩이들과 철교의 위압적인 교각과 어울리던 어둠도 저 숲 밖으로 물러갔다. 지난날과 이 시대의 땅 어디에도 견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철교 옆 늙은 밤나무의 일생이 느린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며 내게 속삭인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세상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것은 성난 바람이었다고. 폭풍 속에서도 비밀처럼 신비의 꽃은 피어 한 가엾은 영혼이 찾아와 나무 아래 잠들었으니 그의 머리 밑 근엄한 그늘은 비워두라고. 그의 그늘이 황량한 꿈으로 채워질 때까지 나무 아래서 아무 것도 추억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