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 공전역 (제1회)
배홍배 시인과 떠나는 추억의 간이역
5. 공전역 (제1회)
-영화 박하사탕과 진소천
열차는 콰이강의 다리 같은 삼탄철교를 지나고 있다. 허공에 위태롭게 놓인 철교 위를 달리는 네 칸짜리 무궁화호 완행열차는 금방이라도 희뿌연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이따금 부르르 떤다.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다. 뭔가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떠오른다. 어느 것을 먼저 따라가야 하는지 내 가늘고 힘이 약한 볼펜은 중도에서 쉽게 지치고 만다. 차창 밖 멀리 거센 파도 같은 산등성이들을 힘겹게 넘어오는 비구름 떼가 천둥산에 막혀 잠시 절망하다 아득한 그리움의 눈물방울들을 후두득 떨어뜨린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린다. 빗물은 흐린 마음의 창에 잃어버린 추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상형문자다. 빗물 한 방울에 하나의 추억과 그 추억을 지우는 다른 빗방울의 망설임 끝에 매달려 영롱하게 빛나는 또 다른 추억 속으로 열차는 달린다.
진소터널 속을 달리는 열차의 바퀴 소리가 영사기 돌아가는 규칙적인 기계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심야 극장 안에 앉아 있는 관객이 된다. 터널 안에서 바라보는 터널 밖의 풍경은 영사기에서 텅 빈 은막에 쏟아지는 빛의 향연이다. 그 속에 영호가 빛 한줌으로 서 있고 기관차는 그를 향해 돌진한다.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파리 한 마리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친다. 나는 유리창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행위로 파리를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손수건을 꺼내 유리창을 깨끗이 닦는다. 가엾은 곤충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폭력적 죽음이 선택되어진 것이다. 파리는 헛된 돌진을 되풀이하다 마침내 머리가 깨져 죽고 만다.
그렇다. 영호는 첫사랑의 반영인 진소천이란 추억의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스스로 폭력적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거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거울의 표면은 맑아져서 그가 꿈꾸는 세상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유리창 안에 갇힌 파리처럼 유리 밖의 세상을 향해 헛된 돌진을 되풀이하다 끝내 머리가 터져 숨지고 만다. 영호는 자신을 처참하게 깨뜨리고 나서야 그가 꿈꾸던 거울 밖의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내 손수건은 파리에게 있어 현실이다. 현실은 파리의 내부에 폭력성을 사육한다. 영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사육되고 있는 폭력적 자아다. 그의 잇단 사업 실패와 가정 파탄은 이 폭력성을 살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현실은 곧 자신의 몸뚱이다. 영호가 자신의 몸뚱이를 살해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역류하며 집요하게 발목을 붙잡는다. 나는 지금 진소터널과 철교와 진소천이 이루는 공간에 아직 고여 있는 그의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공전역에 내리자 빗방울이 그치고 는개가 뿌린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은 나 혼자다. 승객 한 사람을 몇 사람의 역무원이 반긴다. 역무원 여섯 명이 받는 한 달 임금이 일 년 치 여객 운임보다 많다니 이곳 역시 역사의 페이지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하다. 열차가 떠난 조그만 산골 역에 다시 적막이 찾아온다. 무거운 적막을 헤집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몇 분이 기우뚱 들어선다. 인근 읍내에 일요 예배를 보러가기 위해 상행선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리라. 이들은 평생 이 산골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우리의 누나 어머니 할머니들이다. 이들이 간이역의 출구를 통해 세상으로 떠나보낸 동생과 아들과 손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뒤에 남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들에게 희망의 부스러기 정도로 인식되는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이들의 형이하학적 고통은 도시로 간 사람들에게 사소한 관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억한다. 사람들이 간이역의 출구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갈 때 그들의 등 뒤에서 세상의 문이 닫히는 순간 얼마나 그리움에 떨며 뒤돌아보았는지를. 욕망이라는 열차가 혹독한 시련의 망연한 벌판을 지나며 뚜우뚜 울음 울 때, 부질없는 열망의 좁은 계곡을 지나며 우쭐거릴 때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두 다리가 휘어지도록 서서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저 간이역은 알 것이다.
밤새워 내리는 비
길이란 길 다 지우는데
길 없는 길 위로
그리운 것들은 흐르네
세상의 출구를 향해
줄을 설 시간
흐르는 것들과
흐르지 못한 것 사이
어디에도 나
견고하게 서지 못하네
첫차가 들어오면 내 일생
어떻게 진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네, 문득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하행선 완행열차, 그리웠다
내 혈육이여
미명으로 가는 차표 한 장 구겨 쥔
손바닥을 흐르는
차가운 기계의 체액이
너의 외로움 속을
조용히 통과하는 간이역 플래트홈
[